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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기가 러시아 소설을 읽기에는 딱 좋은 계절이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러시아의 대문호에게 영감을 준 시베리아의 굴라크의 작업장에서 내뱉는 숨조차도 차갑게 만드는 추위와 무자비하게 영하로 내려가는 이른 아침 출근길에서의 추위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아. 존나 춥다 씨발
이번에 읽었던 책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내가 도예도프스키의 책을 읽게 될줄은 몰랐다. 유명하다 싶은 사람의 책을 닥치는대로 읽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세상을 등지고 방안에 처박하기로 결심한 남성의 광기서린 독백과 지하로 들어가지 전, 지상에서 있었던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회고록이다.
낭만주의 어쩌고 저쩌고.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불협화음 어쩌고 저쩌고. 도예노프스키의 작품의 정체성 어쩌고 저쩌고.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 어쩌고 저쩌고. 2X2=4, 당시 러시아에 팽배해져 있던 대수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수많은 문학가들에 대해 끼친 영향 어쩌고 저쩌고....
지하 수기에 대해서는 200페이지 남짓한 얉은 책에 50페이지쯤 할애해서 작품해설도 있고, 인터넷을 검색한다면 그보다 더 깊으면서도 쉽게 풀어서 쓴 글이 있으니 그걸 참조하자.
사실 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다. 주인공이 헛소리를 내뱉는 1부에는 3번 정도 졸았고, 커피 빨면서 겨우 넘겼다.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절망적으로 느리고, 또 나에게는 3년 전부터 쓰고 있는 나만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스프링 노트에, 300원짜리 모나미 볼펜의 잉크가 다 떨어질 때까지 적기 시작해 페이지를 글자로 가득 채워놓은 노트가 이제 3권이 넘어간다.
내 노트의 이름은 당연히 지하 수기가 아니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쓰기 시작했었으니까. 나 또한 지하 수기의 주인공이 말한,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지하 인간" 이었고,현재도 이 노트는 오늘의 날짜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다.
물론, 내가 쓰고 있는 노트가 지하 수기처럼 엄청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는 절대 말 못한다. 도끼의 문학적 위상을 생각한다면, 그 독후감을 쓰는 자리에 개인의 창작물을 끼워넣어 비교하는 걸 우습게 여기며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애초에, 내가 쓰기 시작한 노트의 첫번째 이름은 유서였다. 내가 죽게 되면 이 노트가 남을 테니까. 1권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회에 반항적이고, 불평불만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세상을 증오하고, 사람을 증오했으며,국가와 정치를 증오하고, 무엇보다 노력하지 않는 나를 증오하고 있었다.
노트를 쓴 이유는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정기적으로 쓰일 때마다 분노와 광기, 과거에 대한 후회와, 스스로 만들어낸 궤변투성이 개똥철학과 비판을 쏟아냈다. 이때쯤에 나는 처음 적었던 노트의 이름이 한번 바꾸었는데 아마 스스로 배설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변명을 해보자면... 음, 모든 방황하던 젊은 이들이 그렇듯이, 나는 -낭만주의처럼-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모든걸 증오하고 모든것에 분노했다.
아마,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지나고 보면 하찮고 별것 아닌 일들이 분노의 주제였다. 폭식이라던가, 주머니 사정이라던가, 체중계의 숫자라던가. 스스로 하루에 자위를 너무 많이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자기혐오로 그 주제로 글을 쓴적도 있다. 세상은 어릴 때만 해도 세상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가르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주인공은 커녕 자신에게는 단역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분노와 광기는 발작적으로 찾아와서, 몇주동안 노트를 펼치지도 않다가도, 어느 날은 한번에 노트를 펼치고 30페이지씩, 해가 질 때까지 방에 불조차 켜지 않고, 글을 써내려 간적도 있다. 그렇게 글을 쓰고 나서는 어느 정도 후련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이 내가 이 노트를 배설물이라고 부른 이유다. 정액 묻은 휴지를 휴지통에 던져놓는 것마냥, 감정을 싸지르는 용도로 쓰였다.
노트가 한권을 채워가기 시작했을 무렵, 이 노트는 정기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글 쓰는 걸 연습삼아서, 하루에 한 페이지라는 스스로의 할달량을 정했다.
나도 사람이니까 매일 분노하지는 않는다. 어제 가슴 속에 생긴 참지 못할 분노에 응어리를 뱉어내기 위해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질러댔어도, 다음날에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트의 할달량은 있었기에 나는 노트에 아무거나 적기 시작했다. 오늘 먹었던 음식, 어제 본 영화에 대한 감상평, 내일 해야할 일. 했어야 했는데 안 한 일. 눈앞에 단발적인 쾌락을 쫓아서 했던 추잡스러운 일들과 후회스러웠던 일.
별 걸 다 적었다. 낙서, 소설의 설정, 세계 지도(내가 세계 지도를 그릴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에 그린 지도에는 중동과 인도를 빼먹었었다.) 영화 시나리오. 뭐 기타등등. 노트는 상당히 잡다한 느낌으로 변해갔다.
어느 날은, 내 분노의 기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탐구를 하는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 분노의 기원을 찾는 일은 스스로의 인생을 통째로 되짚는 과정이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고, 일주일 전의 일을 생각해보고, 1년 전의 일을 되짚고, 고등학교, 중학교때의 일들을 되짚으면서 적어내려갔다.
시간을 예상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는 사건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므로, 과거로의 탐사는 시간이 걸렸지만 멈추지 않고, 더 깊은 과거로 들어갔다.
한달정도 이지랄을 했던것 같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분노와 자아비판을 하던 중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단 한번도 나를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거대한 착각이었다.
평생동안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이 흐릿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초라한 내 모습은 나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단체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봐도 그건 남처럼 느껴졌다.
학생때부터 남들이 자신을 꾸미려고 노력할때부터, 나는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도 덤덤했고, 기쁜 일이 있을때도 열광적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오랜 시간 몽상속에서 지냈다.그것은 책상 위에 앉아있는 내가 아닌, 자신의 상상속에 있는 자신을 꿈꾸는 백일몽이었으리라.
진정한 내 모습은 이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 진짜 나와, 내 인생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머릿속에 그려넣은 나라는 존재를 나는 사랑했지만, 진실로 거울에 비치는 현실의 초라한 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힘껏 부정하며 밀어냈다.
이건 진짜 내가 아니다. 이것은 진짜 내 인생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인식하지 않았던 모순적인 사고가 나를 괴롭혀왔다.
당연히 내가 인식하는 나와 현실의 내가 다른 모습이니 내가 그토록 화를 냈던 것이다. 분노의 원인은 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스스로도 참으로 많은 자아비판을 했던것 같다. 스스로에게 반성해야 할 부패,폭식,성욕,나태,도덕적 타락과 수많은 죄악, 수치스럽고 파렴치한 일들에 대한 얼마나 많은 채찍질과 힐난, 악을 질러댔는가! 또 얼마나 많은 각오와 다짐, 신념을 세웠지만, 그것이 얼마나 모래 위에 세운 누각처럼 쉽게 무너져 버렸는가!
왜 씨발 이런게 소 귀에 경을 읊듯이 들리지 않았는가. 왜 내가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일에도 고통도, 부끄러움도, 양심의 가책도, 수치조차 느끼지 않았는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건 내가 아니다! 고결하고 완벽한 자신은, 지금 거울 앞에 있는 초라하고 야비하고 비열한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거대한 인식의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부정적인 환경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냈던 방어기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스로 입어버린 갑옷이 너무 두껍고 무거웠고, 내면의 자신까지 압사시키고 있었던 것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사랑받기를 원했다. 상처받은 영혼이 다른 이로서 구원을 받는다. 참으로 흔하고 감동적인 클리셰 아닌가? 그렇지만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도대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마음 속의 분노의 응어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는 미친놈처럼 웃어제꼈다. 카페였는데 한 20분은 넘게 얼굴을 부여잡고 눈물흘리면서 웃은 것 같다.
이것이 내가 써내려갔던 지하 수기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꽤 걸렸지만 드디어 외면하면서 한번도 인정하지 않고 있던 자신을 드디어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뒤로 매일 거울을 보면서 연습을 한다. 거울 속에 비친 이 초라한 모습이 자신이라고 몇번씩이나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제는 도망치는 부정보다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잘 되어가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1년, 한달 전보다는 나아졌고, 앞으로도 나아지이라고 보고 있다.
나는 지하 수기의 주인공을 이해한다. 그와는 가진 이유는 다르겠지만 나 또한 지하 인간이었고, 그와 같은 고뇌를 겪었다. 그리고, 기쁘다. 이런 고민을 했던 게 나만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비록 상처입은 개들이 서로의 치부를 핥아주면서 위로해 주는 감성이지만 뭐 어떠랴. 그런 거에서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받아야 한다.
세상에는 지하 인간이 많을 것이다. 개개인마다 가진 깊은 절망을 안고 개미굴처럼 굴을 파고 지하에 처박힌 인간들의 이야기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지도 않다. 어쩌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절망은 나보다, 지하 수기의 주인공보다 더 무거운 것이라, 그 무게에 짓눌려서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하의 깊은 굴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써내려간 지하 수기를 통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음, 아닌가. 반쯤 발을 걸치고 기어나왔다고 본다. 아직 지상의 빛은 나에게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언젠가는 그래도 한쪽 발도 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나의 노트는, 또다시 이름을 바꿔 지금은 일기가 되어있다. 오늘의 느낀 점을 적어내고, 내일의 해야 할 일을 적는 평범한 일기 말이다. 발작적인 개똥철학을 적어대는 간질은 여전하지만 이정도면 많이 나아진 편이다.
써놓고 쌓여가는 노트를 다시 펼치진 않는다. 아직 그 책을 다시 펼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10년쯤 있다가, 다시 책을 펼쳤을 때, 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라고 웃어넘길 수 있는 미래에 닿아 있길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
상관없는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명작이 맞다. 도끼도 훌륭한 작가다. 약간 졸리긴 했는데 책은 재밌었다. 죄와 벌도 볼것이다. 음, 언젠가는..
실존주의 소설이 뭘 뜻하는건지는 모르겠는데 암튼 이런류의 소설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찾아보기 귀찮다.
나는 힐링용 에세이 같은것보다 인간 실격에서 영혼이 치유을 얻는 사람이다. 약간 삐뚫어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그리고 만약. 스스로 깊은 지하에 틀어박힌, 자신이 지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스스로의 지하 수기를 적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루에 한줄이라도 좋고 형식은 무시하고 뇌에서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손으로 적어내면 된다. 무엇을 적어야 되겠다고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쓸수록 날것 그대로의 자신만의 지하 수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하 수기를 쓸거라면, 그걸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보관하길 바란다. 나도 내 노트가 누군가에게 보여지게 된다면 사회적 죽음을 당한다.
출판할 생각도 없다. 내 지하수기에는 창녀와의 만남도 없는 모쏠아다의 이야기라 별로 재미도 없으니까 말이다.
어... 책의 주인공은 스스로의 지하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일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고? 음.. 이러면 마무리가 안되는데.
뭐, 운이 좋다면 스스로 딛고 일어나서, 해피엔딩으로 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니체가 신을 죽여버린 세계에 살고 있고, 덕분에 구원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어째든 우리는 지상을 살아가야 한다. 어두컴컴하고 습한 자신의 지하에서 빠져나와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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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