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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남한산성>
오랑캐로 낮춰보던 대국의 침략에 힘없는 소국의 왕이 할 수 있는 건 허겁지겁 치는 줄행랑 뿐이다.
그마저도 원래 계획했던 곳이 강화도가 아닌 급한대로 수도 인근의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청나라에 포위당한 채, 그 좁은 산성에서 할 수 있는 건 말싸움 뿐이다.
살기 위해선 죽을 각오로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 그리하여 설령 죽는다고 한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는
김상헌의 말과
임금이라면 굴육을 기꺼이 받아들여서라도 살아남아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을 살피어야 한다라는
최명길의 말과
사실 우리가 무엇을 한 들 그게 우리 뜻대로 되지는 않을터이니, 무엇을 하자고 말을 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는
영의정의 말이
서로 부딪히며 불꽃을 내고, 서로를 휘감으며 소용돌이를 만든다.
김훈하면 밀도 높으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으나,
한국 소설에서 보기 힘든 등장인물들의 고품격 아가리 파이트로 소설을 이끌어 간다는 면에서
오히려 도끼의 소설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모두 다 조선과 임금을 위한 말이었다는 점이, 그리고 말을 참 고상하고 품격있게 한다는 점이
현재의 정치인들의 요사스럽고 천박한 언설과 자연스레 비교되면서
못내 부러웠다.
생각도 없이 말부터 내 뱉으니, 그 말을 곱씹어 볼 필요도 없을테고,
세상의 속도가 빨라지고 일단 튀는 게 중요하니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이 일단 말부터 뱉어야 하는
요즘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일테지만 말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특이하다고 느낀 점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빌드업을 하면서 하나씩 쌓아간다는 느낌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를 칼로 베어서 그 장면 장면들을 스냅 사진처럼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김훈의 스타일이자 한계점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추운 겨울날 읽기 좋은 소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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