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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 서학이 전래된 것은 부경사행원을 통해서였다. 이들은 부경사행을 통해 서학을 접하고 조선왕조에 서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단편적 촌평은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에 대한 촌평을 남긴 것이지만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청의 서양 문물을 소개하며 서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되었고, 효종 대에는 새 역법인 시헌력이 도입된다.


그러나 역법이라는, 농본주의 국가에 필요한 부분만 도입된 상황에서 본격적인 서학 연구는 성호 이익을 위시한 성호학파와 북학파 계열 실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성호 이익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당시 조선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서학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서교(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이는 신후담과 안정복에게 이어진다. 안정복과 신후담은 『천학문답』과 『서학변』을 저술하여 유교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였다.  


비록 이 둘의 천주교 비판은 유교적 입장이었기에 실제의 교리와 괴리를 이루었으나, 유학자의 서학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서 평가할 만하다. 


북학파는 직접 사행을 통해 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고, 직접적인 기술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서양 과학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였고, 박제가는 적극적으로 서양인과 서양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유규경과 최한기에게 이어졌으나 언급한 인물들은 중앙정계와 차이가 있어 이것이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신앙으로서의 천주교 수용 역시 1784년 이승훈이 의해 천주교회가 설립된 이후 수많은 박해에도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은 당시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내적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고, 황사영 백서 사건과 같은 무모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 패착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 난학은 직접적으로 서양인과 교류하면서 유학도 보내는 등 서양 학문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조선은 한역서학서와 서양인 신부라는 2차적 정보원을 통해 서학을 수용했고, 수용한 서학조차 기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또한  80년대에 나온 연구서 답게 서학 및 실학에서 근대성을 찾고자 하는 방면으로 연구가 진행된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