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서에 대한 몇 가지 견해


* 1950년 5월 베니스에서는 유럽문화인협회 (sorieté eurovepcienne it culture)〉가 창설되었다. 이 협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여 많은 작가와 학자 및 예술가들을 규합할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일년에 두 번 간행물을 발간했다. 1951년, 이 협회는 예술에 위기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문서를 작성하여 회원들의 의견을 물었었는데, 엘뤼아르는 그 설문서에 대한 답변을 일관되게 허술하였다.

이 글은 엘뤼아르 예술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역자 오생근


귀하의 설문서가 말하고 있듯이 예술이 <예술가와 사회의 근본적인 조화>를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의 기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본능이라든가 감수성, 삶의 욕망 또는 인생과 유일한 진실에 대한 애정, 이 모든 것 위에 바탕을 둔 이성과 참된 지성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들은 이 넓은 세계에서 인간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침식하고 있는 거대한 어둠의 물결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상황만이 또는 인간과 세계, 예술가와 사회 사이에 실현된 조화만이 예술작품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부랑자들 틈에서 살던 비용이나 전쟁 중의 휘트먼, 압생트주(酒)에 빠져 몸을 망친 베를렌조차도 시를 노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대부분의 나약한 인간들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파멸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진실 때문에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술가가 창조에의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정확히 말하여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일상적인 불일치로부터입니다. 그는 이 세계가 허락하지 않는 (근본적인 조화〉를 완성하고 실현하려는 꿈을 갖는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을 소생 시킵니다. 굶주림을 겪은 인간은 비로소 더 이상 굶지 않으려고 하듯이 전쟁을 겪은 인간은 살인을 혐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의는 우리의 마음속에 정의에 대한 열정을 불타오르게 합니다. 예술가는 책임져야 할 현실의 증인이며 그의 역할은 비열, 추악, 비참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죄악을 고발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현실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예술의 위기〉란 <예술가와 사회와의 근본적인 조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예술가가 이 잔인하고 거짓된 죄악의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일치되는 곳에서 예술의 위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폴 클로델이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 낙하산병들의 영광을 위해 시를 쓸 때 폴 클로델의 예술에 위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이성과 감정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전쟁의 에피소드를 조화롭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마르셀 주앙도가 <타락론〉 따위로 예술작품을 만들 때, 장 주네와 장 폴 사르트르가 그들 주변의 사회와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그들의 재능과 창조력으로 조화를 이룰 때 예술의 위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그 어떤 사회와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문제도 아니며 사회가 예술가와 또는 그 어떤 예술가와 조화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술가의 의무란 어느 곳에서는 동의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어느 곳에서는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자기의 직무를 얼마나 잘 완수했는가 하는 것을 잘 알기 위해서 비평가는 우선 그 인간과 작품의 내용, 상황, 수단, 동기, 방법 등의 모든 조건을 고려해야 합니다. 단순하고 절대적인 예술의 위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예술가들과 위대한 창조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힘들이 못쓰게 되고 많은 지성들이 악에 복종하고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시선과 미소가 부패되고 허물어지는 것들을 보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귀하는 예술을 혼란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란하게 하고 어둡게 한다는 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술가와 시인, 작가가 거짓을 말할 때에 존재합니다. 거짓말이란 밑바닥의 더러운 현실과 투쟁하지 않고 단순하게 수락한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술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현실을 꿰뚫고,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현실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 노출되며 현실은 불행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공허하고 괴물스러운 것이 됩니다. 현실의 다른 이름은 백치와 불행과 질병과 전쟁입니다. 현실은 욕설을 하고 악취를 풍기며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설문서에서 제기되는 사회적 현실과 예술적 창조) 사이에 또는 사회와 예술가 사이에 이율배반을 해결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정신적 활동입니다. 우리는 귀하가 말하는 <예술 부흥에 필요 불가결한 사회적 조건>이란 것과 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는 사회를 재현하거나 또는 창조하는 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정신적 조건과를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는 선을 낳게 하기 위해서 악을 거부해야 하고 정의가 일상적이 되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그의 작품은 불의에 대한 도전과 거부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무게와 자기 자신의 무게, 세계 내부에서 인간의 무게와 인간 내부에서 세계의 무게를 짊어질 경우에 비로소 예술가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경쾌하고 빛나는 삶을 창조하게 됩니다.


오늘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동하는 일입니다. 예술은 생의 계단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그 지평을 넓혀가야 합니다. 물방울이 가느다란 여과기를 통해서 정화되듯이 보다 맑고 보다 순수한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술의 위기는 오로지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하고 현실의 비열함을 이 현실의 땅과 같은 차원에서 모방할 때와 또한 일치할 수 없는 것을 자신과 일치시키려 할 때 발생합니다.


그러나 어떤 예술가의 작품이 불완전하고 나약하며 미완성 작품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귀하의 설문서에 쓰인 말 그대로) <예술을 소생하게 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린다〉고 답변한다면 그것은 예술가에게는 나태한 비겁이며 정당화될 수 없는 패배인 것입니다. (지난날 중세의 우리 인간들은 .……)하고 엄숙하게 선언을 하면서 무대에 등장하는 낡아 빠진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비웃음을 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가 〈르네상스 이전의 우리 예술가들은……) 하고 한탄할 만큼 지성의 한계를 보인다면 야유와 동정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갈증과 야망이 요구하는 문예 부흥이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술가들이 앞장서서 그 거대한 변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예술과 사회와의 조화가 수동적이거나 방관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며 그 변혁을 통하여 예술가들은 변모하거나 성장하는 것입니다. 수확이 약속된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만족할 예술은 위기의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의사가 치료해 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되며 상처를 아물게 하는 만병통치약을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보리로 자라는 것은 파묻힌 씨앗이며 정원사나 농부는 다만 그 보리의 성장을 보호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을 위한 정책을 무시한 그 어떤 노동 정책이 있을 수 없듯이 획일적인 문화 정책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화 정책>이라는 특이한 개념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오락이라든가 물질적인 욕망 따위의 것 만으로 예술가가 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땅을 경작하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이나 공작 기계를 다루는 사람, 시인이나 회계사, 그 모든 사람들은 같은 사랑과 같은 희망, 같은 고통과 같은 기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 이 넓은 한계의 테두리 속에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유와 평화를 필요로 합니다. 그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 그들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과 시인에 대한 속물의 억압, 순교자에 대한 사형 집행자의 억압 이러한 억압의 더러운 진흙물 속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인간적인 사상, 예술가의 사상은 정원사와 노동자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소박하게 삶과 삶의 행복이 아닌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사상의 통일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건강과 화금석을 되찾아야 합니다.


귀하가 확신하고 있는 이 <혼돈〉과〈어둠> 속에서 우리를 빠져나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사회의 영향력도 아니고 예술가에 대한 주위 환경의 영향력도 아닙니다. 예술이 진실한 것이라면 또는 예술이 명징한 노래이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단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가혹한 현실일지라도 혼란에 휩싸이지 않으리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편안한 높은 곳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며 안일한 자기 만족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로트레아몽이 <맥빠진 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서 곧 연상되는 그런 우아한 우울 속에 예술가가 빠져든다는 것은 어리석고 비겁한 일입니다. 시인이란 이름이 우스꽝스럽게 된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아야 하고 시인은 형제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며, 시인은 빵의 무게와 배고프려 하지 않는 인간의 열정적인 경쾌함을 지녀야 합니다.


(귀하의 설문서를 다시 인용하는 말이 되겠지만)

왜 예술은 본질적으로 예술과 관련을 맺고 또 그것을 위협하는 모든 것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입니까? <예술가와 사회와의 살아 있는 조화, 바로 그러한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예술의 책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예술이란 그 일의 목적이며 혜택을 입는 편이기 때문이다〉라고 귀하의 설문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문장의 흐름이 좀 더 계속되는 곳에서 귀하가 부인하는 예술의 의무는 진정한 예술이 가능해질 수 있는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서 예술가가 참여해야 할 의무라는 말로 다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혜택을 입는 편이란 말은 악용되고 그 의미가 약화될 우려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술가와 시인은 다른 사람들이 정복한 것의 혜택을 입을 때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 자신에 의하여 정복자이면서 또한 해방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언제나 부족했던 것은 그러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시는 결코 장애물에 갇혀있기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자체로 어떤 목적이 제기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가 신을 노래했을 때는 인간의 영생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영생에 대한 문제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로 변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희망은 투쟁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에게 기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문제, 그것은 결코 어느 때라도 사랑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임을 알지만, 혹시 느끼실 지 모르는 작은 차이에 앞서, 큰 공유를 읽어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