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긴 글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글자가 많은 두꺼운 책을 보면 그게 엄청 장엄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방대한 지식이 질서를 갖추고 나열돼 그 실상은 표지로 덮여

무덤덤하게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그 어떤 도전이라도 받아 들이겠다는 책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걸 써낼 수 있는 능력이 갖고 싶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지적 허영을 부리고 싶었다.

어떤 이에게든 `너의 역량으론 읽기엔 무리다. 하지만 도전해보겠는가?`

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줄 수 있는 두꺼운 책을 쓰고 싶었다.

내게는 이런 긴 글에 대한 마려움과 환상이 늘 존재했다.


어릴 때 일기나 독후감상문을 쓰면 늘 길게 썼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묘사하고 느낌들을 적어 내면서 부족한 어휘력을

국어사전과 문학 소설에서 찾아내 고를 줄 알았고 덕분에

일기로, 독후감으로, 글짓기로 상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쓴 것들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보물이면서 버리고 싶은 과오이자 애증이 깃든 애물단지다.


내용은 대개 묘사와 인용, 그리고 원글을 그대로 복사해 적으며

이 책 이런 말이 있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단 식의 형식적인 말 늘리기가 전부였다.

내가 쓴 것이지만 이때의 내가 도대체 어떤 느낌을 지녔었으며 어떡하길 원했으며

어떤 기분이었는지, 전혀 모를 내용으로 가득해 있었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온 구절이 반. 느낀 점 한 줄. 감상 한 줄. 등장인물이 한 말이 반. 내 생각 한 줄.

이런 식의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문제를 알지 못했고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글 좀 쓴다는 자랑도 은연중에 많이 비쳤는데

한날 계기로 내 글을 돌아보면서, 블로그에 쓴 글을 검열하며 돌아보니

블로그에 그럴듯한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