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끝까지 백수로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물론 돈이 없어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서른네 살까지 백수생활을 했다. 사실 그게 1~2개월이 제일 힘들지 2년 정도 지나면 리듬이 생긴다. 백수리듬을 타게 되면 사람이 참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성취욕 그런 게 없으니까 뭐 특별히 급할 것도 화낼 것도 없다. 일생에서 직업적으로 제일 길게 한 것이 백수인데, 아마 감독이란 직업도 영화를 안 찍을 때는 도로 백수일 수 있어서 선택한 것 같다. 백수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뒷마무리가 정해지는 것 같다. 이건 나중에 돈으로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주옥같은 시간이니까.

나는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편이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빨리 쓸 수 있는 건 아마도 다년간 쌓아온 '백수공력'이 아닌가 싶다. 백수 때 많이 보고 잘 놀고 10년간 받아들이기만 하고 한번도 쏟지 않았던 어떤 것이 무진장한 창작욕구가 되었고, 지금 영화감독이 되어 한번에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든다. 이런 백수기가 나에겐 감독이 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 …

<김지운의 숏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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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왕> <장화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 <밀정> 등등

재밌고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김지운 감독.

그의 인생 여정도 재밌고 독특하다.

대학에서 제적당한 그는 그 길로 아싸리 10년을 놀아버린다.

그리고 1998년, 34살에서야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다.

이런 이력은 지금으로 치면 마흔 넘어서야 사회생활을 시작한 정도의 체감이 아닐까?

다만 백수 시절에 각본 작업도 하고, 배우로서 무대에 서기도 했으니 아예 놀진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저런 단기 일자리였겠지만.

그리고 독서와 영화 감상만큼은 부지런히 했다고 하니, 그는 사실 10년 동안 폐관수련을 한 셈이다.

사람 일은 이런 때 보면 참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