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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인데도 5일인가 6인가 독파하기 힘드네. 막날에는 노로바이러스까지 와서 병든 몸에 감수성이 조금 둔해졌다.
칸트 물자체에 대한 해명을 미지로 남겨놨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로 치환하여 해석해버린다.
플라톤 이데아론과 물자체의 차이점은 시공간의 직관에 귀속되어 있는가인데 후자는 시공간의 너머이고,
그래서 인과관계의 근거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 칸트 철학을 계승하여 의지론도 객관적 의지는 사변적인 형이상학 영역으로 승화되어버린다.
여기까진 너무 형이상학적인 얘기인데
쇼펜하우어의 진가는 철학에 주관성을 도입한데 있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 본인은 피히테가 근거율을 도외시하고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했으나 안읽어봐서 잘모르겠고,
어쨋든 쇼펜하우어가 예술가들한테 영감을 준것도, 책에 분량을 보면 예술을 주제로 다루는 분량이 다른 철학서와 비교하여 압도적이다. 조각,회화,비극,시,음악 장르마다 다 다룬다. 표상은 감성과 밀접한 연관 있고, 의지도 주관성의 상징이다. 물론 쇼펜하우어 본인은 객관적 의지를 도입하여 범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의지라는 단어도 주관성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예술가들은 학자들과 달리 더욱더 주관적이다. 예술에는 팩트가 아니라 표현이다. 팩트는 객관적인 잣대를 요구한다. 이미 1장 서두부터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연이어서 세계는 나의 의지이다. 주관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 다른 좋아하는 구절로 '음악이란 자신이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이상학에 관한 정신의 무의식적인 연습이다.', '의욕은 배울수 없다'가 있기도 하고 쇼펜하우어 만큼 예술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해박한 이해를 지닌 철학자는 드물다. 하이데거가 쓴 예술의 근원에 대하여 그거 보면 휠덜린 시 하나 물고 예술에 대한 사례들 제시 없이 철학적 담론만 하니까 지겨워서 접은적 있었다. 미학자들은 미학이란 말치고 미술작품만 관심이 많다.
주관성의 도입과 흔히 염세주의로 알려지는 것의 관계. 단지 세상에 있는 고통에 대해 강조하여 말한 것 뿐인데 염세주의로 알려지는 것은 억울한 면모가 있지. 물론 쇼펜하우어식 개체의 의지는 무조건 악한것이긴 하다. 근데 기독교식 원죄설이나 불교식 고집멸도는 염세주의로 취급 안받는다. 종교들은 한번씩 헤게모니 장악한 적 있고, 쇼펜하우어 이론은 아직까지 헤게모니를 장악한적이 없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인간의 의식이 고도화 되어있기 때문에 고통에도 더 예민하다는 진리를 변형하여 인간이 주관성을 갖추기 때문에 의식이 고도화 되고 고통에도 더 예민해진다고 여겨진다. 노예새끼들 하는 짓도 전부 사회규범적으로 옳은 행위 였다. 사회규범, 집단표상 군중심리 합리적인 면모와 비합리적인 면모가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객관성이란 것도 비합리적인 면모가 섞여있다. 그것을 학자들은 좋다고 물고 들어온다. 적어도 근거율적인 당위성에 대한 고찰없이 부화뇌동하는 면모는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의 본질과 객관적 의지는 시공간을 초월해있기 때문에 근거율적인 당위성을 따지는게 무의미하지만 적어도 근거율의 깊이에 있어서는 주관성이 훨씬더 심오하지 않을까? 집단표상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는 한 객관성은 순응을 덕목으로서 양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고와 같은 식의 평화가 있다. 하지만 주관성은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고 이기심에 의해 격렬하기 때문에 고통 받는 점은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인 인간이 더욱 고통 받는다. 오히려 의식이 고도화 되서 고통에 예민한게 아니라 고통에 예민해서 의식이 고도화 됐을 수 있다. 고통은 사색의 연료를 제공한다. 감성에 고통만큼 적극적으로 영향 끼치는 것도 없고, 그 자극을 통하여 사색을 한다. 그래서 근거율에서 주관적인 사람이 깊이가 있다.
객관적 의지라는 사변적인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의지를 체념하고 관조의 수준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예술도 관조를 통해 심미성이나 숭고함을 취한다는 것도 더더욱 말이 안된다. 예술가들 성격은 그면 온순하고 고분고분하던가? 아니다. 괴팍하고 성마른 인간이 많다는 건 사례가 무수히 많다. 오히려 의지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의지에 대한 긍정에 가깝다. 쇼펜하우어식 논리면 예술가들은 금욕주의적 수도사나 사제 계급에서 많이 나와야한다. 하지만 확실히 세속화 된 이후부터 예술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개별적 의지가 무조건 악하다는 것도 오류이다. 쇼펜하우어식 부정을 통한 체념이 선이 아니라 아니라 오히려 긍정을 통한 희망이 선일수도 있다. 객관적 의지라는 것도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의 신의 포지션과 같이 존재가 의심스러운 대상이다. 근거율을 부정할게 아니라 근거율을 최대한 깊숙히 파악하여 뿌리 깊히 파악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또 쇼펜하우어는 천재와 근거율의 관계를 부정하기 위하여 일부러 뉴턴이나 수학자들의 천재성도 부정하였다. 내가 보기엔 문학가들도 그렇고, 최대한 정교한 사색의 결실인거 같은데, 음악가들이 수학적 사고하는 점은 어떻고.
쇼펜하우어 윤리학도 너무 사변적이다. 객관적 의지. 너는 나이다.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믿음은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진짜 고통받는 사람한테 그런 설교가 먹힐지는 알수 없다. 의지의 체념도 비현실적이다.
책에 대한 이해가 깊으신 것 같네요...
그래도 인생론은 실천적임
멋진 글. 내용의 요약이 아닌 개인적 의견이 듬뿍 들어 있어서 더 아름다운 글. 재미나게 읽음.
공감. 그냥 불교가 더 정확하고 가깝잖아? 이런 생각이 들었음.
불교와 가깝다고 하는데 사실 힌두교와 더 가까운 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