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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게 여성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남자는 두가지를 원함세: 위험과 놀이. 그래서 남성은 가장 위험한 장난감인 여성을 원하네. 남자는 전쟁에 나가야하고, 여자는 전사들을 위문해야만 하네: 다른 방도는 어리석을 뿐이야. 달기만 한 과일 - 전사가 좋아할 것이 아니지. 그래서 여자를 좋아한다: 가장 달콤한 여자조차 씁쓸하지. 진정한 사내 속의 아이는 숨겨져 있어: 놀고 싶어 해. 자, 여성분들께서는 남자 속의 아이를 찾아보시오! 여성은 장난감이 될지어라, 곱고 순수해, 보석과 같아, 아직 오지 아니한 세상의 미덕들에 빛을 받을지어라.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고 해보자.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카드가 뒤집히는 것. 도박꾼에게 있어 온 우주가 그 순간을 향해 재깍거리며 작동해 왔지, 저 자가 내 손에 죽을 것인가 내가 저 자의 손에 죽을 것인가. 존재할 가치에 대한 더 확실한 증명이 있겠는가? 게임이 그 궁극적인 상태로 치달을때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는 없네. 한 놈이 다른 놈 대신에 선택받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이고, 무관한 제 삼자만이 그 거대함과 효력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선택에 대해 깊이 평가할수 있어. 그 게임이 패배자의 제거를 담보로 두고 있기 때문에 판결은 명료하네. 어떠한 카드의 조합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 때문에 존재를 박탈당하지. 이것이 전쟁의 본질이고 담보로 걸린 것이 곧 게임이고 권한이고 정당성이다. 이렇게 보면 전쟁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신탁일세. 그것은 의지와 다른 한 의지, 그들을 묶고 선택을 강요하는 더 거대한 의지의 재판이야. 전쟁은 존재의 주체를 강요하는 궁극의 게임일세. (핏빛 자오선)
사실 니체보다는 융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음.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태초에 말이 있었다'에서 '태초에 생각이 있었다', '태초에 힘이 있었다'로 바꾸어 봄.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에 이르름. 이처럼 행동은 개념에 선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임. 실재로 전쟁이란 단어는 행위의 추상화이며, 인간이 전쟁을 알았기에 전쟁을 벌였다는 식의 설명은 전쟁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인과관계를 거꾸로 둔 것에 불과함. 사람이 사랑을 하고, 전쟁을 벌이고, 복수를 한다는 식의 말도 마찬가지로 주종관계가 바뀌어 있음. 이것들이 사람에게 씌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거임. 현대인들은 사람에게 전쟁을 하는 본성이 있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지만 결국 전쟁이 인류보다 오래되었고 더 오래갈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 또한 우리가 이러한 힘들에 씌이게 됐을 때 우리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반대로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거임
칼 융은 이런 식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원형이라고 불렀음. 개념을 확장하자면 현자, 전사, 농부, 시장, 시인, 상인, 의사등의 직업들도 원형이라 부를 수 있을거임. 원형이 개인을 압도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음. 예를 들어 현자가 실재로는 별로 현명하지 않으며 사회적 권위에 의해 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젊은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발견해낸 지혜조차 현자의 권위를 이용해 정당화하곤 할거임. "그 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로 현자 개인의 지혜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그가 현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중요함. 아직까지도 학자나 예술가들이 사후에도 권위를 유지하며 반쯤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음. 핏빛 자오선에선 이런 원형에 잡아먹힌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함. 의사는 그냥 의사로, 성직자는 그냥 성직자라고만 서술됨. 판사도 마찬가지임. 심지어는 늙은 수행승이라고 서술된 인물이 속물적 발언을 내뱉고 밤중에 소년을 덮치려하는 장면까지 나옴. 이들이 서술된 것처럼 대단한 인물이 아니였다고 해도, 맡은 역할에 비하면 개인의 세부사항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곤 할 수 없음
원형적인 이야기, 특히 영웅담과 신화는 과거로 돌아갈수록 흔해짐. 핏빛 자오선은 원형과 미신에 대한 심리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신화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음. 19세기 모험소설의 문체를 모방하며 심리학적인 서부극을 썼단 점에서,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중세시대 기사담을 재구성하려 했단 점에서 핏빛 자오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컨셉에 잡아먹힌 소설임. 어디까지가 계산된거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관점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핏빛 자오선이 최고의 장르소설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함
두 사람이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고 해보자.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카드가 뒤집히는 것. 도박꾼에게 있어 온 우주가 그 순간을 향해 재깍거리며 작동해 왔지, 저 자가 내 손에 죽을 것인가 내가 저 자의 손에 죽을 것인가. 존재할 가치에 대한 더 확실한 증명이 있겠는가? 게임이 그 궁극적인 상태로 치달을때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는 없네. 한 놈이 다른 놈 대신에 선택받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이고, 무관한 제 삼자만이 그 거대함과 효력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선택에 대해 깊이 평가할수 있어. 그 게임이 패배자의 제거를 담보로 두고 있기 때문에 판결은 명료하네. 어떠한 카드의 조합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 때문에 존재를 박탈당하지. 이것이 전쟁의 본질이고 담보로 걸린 것이 곧 게임이고 권한이고 정당성이다. 이렇게 보면 전쟁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신탁일세. 그것은 의지와 다른 한 의지, 그들을 묶고 선택을 강요하는 더 거대한 의지의 재판이야. 전쟁은 존재의 주체를 강요하는 궁극의 게임일세. (핏빛 자오선)
사실 니체보다는 융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음.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태초에 말이 있었다'에서 '태초에 생각이 있었다', '태초에 힘이 있었다'로 바꾸어 봄.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에 이르름. 이처럼 행동은 개념에 선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임. 실재로 전쟁이란 단어는 행위의 추상화이며, 인간이 전쟁을 알았기에 전쟁을 벌였다는 식의 설명은 전쟁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인과관계를 거꾸로 둔 것에 불과함. 사람이 사랑을 하고, 전쟁을 벌이고, 복수를 한다는 식의 말도 마찬가지로 주종관계가 바뀌어 있음. 이것들이 사람에게 씌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거임. 현대인들은 사람에게 전쟁을 하는 본성이 있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지만 결국 전쟁이 인류보다 오래되었고 더 오래갈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 또한 우리가 이러한 힘들에 씌이게 됐을 때 우리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반대로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거임
칼 융은 이런 식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원형이라고 불렀음. 개념을 확장하자면 현자, 전사, 농부, 시장, 시인, 상인, 의사등의 직업들도 원형이라 부를 수 있을거임. 원형이 개인을 압도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음. 예를 들어 현자가 실재로는 별로 현명하지 않으며 사회적 권위에 의해 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젊은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발견해낸 지혜조차 현자의 권위를 이용해 정당화하곤 할거임. "그 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로 현자 개인의 지혜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그가 현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중요함. 아직까지도 학자나 예술가들이 사후에도 권위를 유지하며 반쯤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음. 핏빛 자오선에선 이런 원형에 잡아먹힌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함. 의사는 그냥 의사로, 성직자는 그냥 성직자라고만 서술됨. 판사도 마찬가지임. 심지어는 늙은 수행승이라고 서술된 인물이 속물적 발언을 내뱉고 밤중에 소년을 덮치려하는 장면까지 나옴. 이들이 서술된 것처럼 대단한 인물이 아니였다고 해도, 맡은 역할에 비하면 개인의 세부사항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곤 할 수 없음
원형적인 이야기, 특히 영웅담과 신화는 과거로 돌아갈수록 흔해짐. 핏빛 자오선은 원형과 미신에 대한 심리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신화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음. 19세기 모험소설의 문체를 모방하며 심리학적인 서부극을 썼단 점에서,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중세시대 기사담을 재구성하려 했단 점에서 핏빛 자오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컨셉에 잡아먹힌 소설임. 어디까지가 계산된거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관점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핏빛 자오선이 최고의 장르소설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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