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전공할 거 아니면 굳이 칸트의 저작을 직접 읽을 필요 없음.

자기 만족이라면 어려워도 걍 좀 읽다가 때려쳐도 아무 문제 없고. 일단 눈으로 한번 봤음 만족될 거 아냐?


읽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거나, 정말 제대로 알고 싶다고 쳐도 직접 읽을 필요도 별로 없음.

공부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직접 안 읽어도 특정 책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고 그 책에 대해서 불편함 없이 언급할 수 있게 됨.

뭐 이 정도 되면 그 책을 직접 읽어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되지.(뭐 이렇게 되는 게 어려우니까 문제겠지만 말이야)


먼저 한가지 얘기할 게 있음.

칸트는 절대로 어려운 저자가 아니야.

칸트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고 얘네 둘이 엄청 어렵다는 건 다 헛소리야.

이런 얘기하는 사람은 두 부류야.

하나는 칸트 전공자 중 약팔이들. 자기가 전공하고 있는 사람을 어렵게 설명하면서 약파는 경우지.

뭐 이런 경우 대체로 연구능력이 안 좋으니 무시해도 돼.(국내 철학자 중 칸트 전공자가 제일 많고 멍청한 놈들이 최후의 보루로 칸트 전공하는 경우가 많음)

다른 하나는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로 칸트를 읽으려다가 빡친 경우지.

이 두 경우 각각 오류가 있으니 무시해도 돼.


칸트나 헤겔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얘네가 어떤 이유에서 누구를 상대로 책을 썼는지 제대로 몰라서 그래.

당대에 핫한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우리는 그런 문제가 뭐인지 모르니까 잘 이해를 못하게 되는 거지.

그러니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해야해. 근데 그냥 플라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쓴 약팔이 책 말고, 정말 제대로 된 연구서를 읽을 필요가 있어. 이건 꼭 철학사 책만 얘기할 거는 아니야. 공부하면 알겠지만 문학에서의 논의나 과학에서의 논의가 철학에서도 이뤄지거든... 철학자 중에 이런 부분을 제대로 못 파악해서 헛소리 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다른 분야의 논쟁적인 단어들이 철학적인 논의를 위해 수용되고 철학적 논의가 다시 그쪽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아. 특히 18세기에는 이게 활발했음. 칸트를 이해하려면 당대 역사와 여러 분야의 논의들을 정말 잘 알아야해.

2. 철학적 개념의 틀을 잡아야해. 문제는 칸트의 선험이 무엇인가, 통각이 무엇인가 따위가 아니야. 그냥 철학적 문제를 다룰 때 필요한 개념들이 있어. 그것들을 좀 갖출 필요가 있지. 이건 현대 분석철학 쪽 논의를 배우면서 익히는 게 좋아. 그럼 칸트를 볼 때도, 오늘날 용어로 번역되고, 칸트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거든. 문제는 이게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건데, 실제로 깊게 해보면 도움이 되면 됐지 오해가 커지진 않아. 대충 이런 입장이라는 걸 확인하는 거지 그렇다고 딱 이런 입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걸 본인도 알거덩. 뭐 현대분석철학 쪽에서 주제별로 쓰여진 깊이 있는 개론서를 보면서 각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기본적인 툴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툴로 칸트가 사용하는 언어들을 분석하는 거지. 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구나~ 하면서.


이 두 가지가 제대로 되면 대체로 철학책 읽을 때 진도가 잘 안 나가는 수는 있어도(나도 한번에 할 수 있는 공부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읽고 있음 좀이 쑤시거덩ㅋㅋ) 읽다가 도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경우는 없어. 칸트가 처음 보는 용어로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도, 이어지는 주장을 보면서 칸트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추적할 수 있거덩. 철학자마다 "이성적인"의 의미를 다 다르게 쓰는데 읽는데 무리가 없는 것은,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이성적인"의 의미를 어떻게 쓰는지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칸트를 읽을 때도 그렇게 읽으면 돼. 당대에 문제가 뭐였는지, 칸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개입하는지, 그리고 그 문제에 개입할 때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지만 알면 칸트를 읽을 때 어려운 건 없어져. 오히려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들이 발견될 뿐이지.(이 문제에 대해서 칸트가 이런 입장을 취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게 됨)


이렇게 읽어야 칸트가 왜 중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돼. 그냥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니 이딴 소리를 한다고 그 사람이 대단한 건지 어떻게 알아.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걔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고,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는지를 알아야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기여한 바가 뭔지를 알게 되지.

그리고 이걸 알아야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어. 칸트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입장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입장인데, 칸트 이후에는 칸트의 비판에 의해 더이상 그런 입장이 설득력 있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보면 칸트가 얼마나 쎈 인물인지 알게 되지. 다른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야. 대체로 떠들어대는 주장은 다 헛소리인 경우가 많고, 그 철학자가 진짜로 기여한 바는 특정 문제에 대한 논의 구도를 비가역적으로 바꾼 일인 법이거덩.


그러니 고전적인 철학책을 맥락 없이 읽지마. 그래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걍 이상한 용어들만 배우는 거지.

허세만 늘고 누가 뭔 얘기했다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기억만 늘어.

진짜 제대로 공부하고 싶으면, 역사랑 현대 분석철학을 파야해.


내가 분석철학을 추천하는 건 분석철학이 큰 진입장벽 없이도 공부할 수는 있기 때문이야.

분석철학도 맥락이 좀 있는데, 맥락을 몰라도 이해할 수 있게 정리된 경우가 많아.(분석철학 쪽은 교과서가 있다)

그러니 분석철학 내부의 맥락을 몰라도 개념 공부하는데는 딱히 큰 문제가 없음.

뭐 분석철학 쪽도 제대로 공부하려면 맥락이 중요한데, 박사 딴 색끼들 중에서도 맥락 안 따지는 십새들이 많은 거 보면 딱히 몰라도 연구하는데는 지장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