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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구글에 장자 곽상주를 검색하면 무료로 곽상주의 한글 번역본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터넷은 정말 광대합니다.





보면서 느낀 건데 주석서의 형태라 얘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어서 그렇지 모아서 보면 되게 정합적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의 기본적인 사상은 당시 위진 현학의 두 흐름, 요컨대 왕필(대충 무無에서 모든 게 나오고 무가 모든 걸 다 다스리고 그러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도 무와 같아야 한다는 것)과 배위(대충 유有한 사물들이 서로 의지하여 다스려지는 것이니 군주는 예를 지정해서 서로 의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의 학문적 경향을 하나로 통합한 것입니다.




요컨대 유와 무의 대립과 그 통합이란 것인데, 정말 알아보기 쉬운 전개 과정 아닙니까? 요즘 사유하는 자들은 자기들 사유에 이름도 어렵게 붙여 대서 참 힘듭니다.





암튼 세상을 궁극적으로 "다스리는" 게 유냐 무냐 하는 문제는 이 문제가 원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임을 안다면 그 배경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핵심은 사람들의 성性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재 수단이 없는 원시 상태의 갈등은 사회를 이원화시키면서 서로의 파괴를 불러옵니다. 개개인을 신경 쓰지 않는 고압적인 정부는 똑같이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정부와 민간을 이원화시킵니다. 양자 모두 지양할 필요가 있음을 중국인들은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의 기억에서 확실히 배웠습니다.





자연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연에 부조화가 어딨겠습니까. 사슴 수백마리가 벼락 맞고 죽어도 다 자연 원리에 따른 것이고 벼락 맞으면 죽는 것도 사슴의 내재된 본성에 따른 것이죠.



그런데 인간의 정치적 질서는 자연 질서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사유하여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자연은 어떻게 만물을 다스리는 것인가? 이를 알아낸다면 사람이 문명을 다스리는 데에도 그 방법을 적용할 수 있겠죠. 위진 현학은 물론이요 그 이전 한나라의 현학과 공양학도 이러한 아이디어를 전제로 성립하고 있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곽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자연의 다스림을 유로 설명하는 쪽이나 무로 설명하는 쪽이나 논리적인 난점은 존재했습니다.




곽상에 따르면: "조물주는 유有인가? 유라면, 어떻게 다수의 사물들을 생生할 수 있는가? 조물주가 무無라면, 무는 없는데 어찌 사물을 생할 수 있는가?"






다스리는 자가 여타 사물들과 마찬가지의 상대적인 사물이라면 다수의 사물들을 다스리는 단일한 체제가 될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적과 우리를 구분하는 법체계가 자신에게 상대되는 집단을 두기에 보편적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 추상적이고 모호한 다스리는 자를 상정할 수록, 그런 존재가 어떻게 실제로 다스림이라는 활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배위가 말했듯이 우리가 낚시를 하고 담장을 넘고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닙니까? 무가 어떻게 다스림이라는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음악과 시만으로는 사람들의 갈등을 중재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곽상은 급진적인 결론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조물주가 어떤 상태라고 하든 우리는 모순에 직면한다. 따라서 만물은 어떤 궁극적인 원리나 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홀로 화한다(獨化).





현학에서 무엇을 다스리는 자는 또한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 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더욱 급진적인 결론이 됩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연의 존재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자연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자연의 존재들이 자기의 본성대로 존재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곽상에 따르면 아무것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홀로 생겨났고 그에 따라 홀로 사라지며 내, 외부의 그 어떤 것도 변화의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사물들은 사실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고 그렇게 자기들 멋대로 생겨난 것들이 어쩌다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지나 생각 역시 마찬가지라 당신의 삶이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원인이 못 됩니다. 노력을 하든 말든 왕은 왕이요 백성은 백성일 것이며, 그들의 본성에 따라 그 상황이 바뀌든가 말든가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혼자이기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철저한 고독에서 곽상은 조화의 단서를 찾습니다. 그는 묘합妙合을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본성에 따라 변화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타자는 전혀 자신의 걸림돌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도 더 이상 나의 알 바가 아니게 됩니다. 내가 이런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런 것입니다.







그는 "조정에 앉아 있으면서 마음은 산야에 가 있는" 경지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군주가 어떤 의도를 가지지 않고 "무심"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을 조언합니다. 그 무엇도 나의 행동에 의해서 바뀌지 않기에, 그는 체제를 파괴하려고도 탈출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남들에 의해서 바뀌지 않기에. 굳이 제도 개혁을 안 해도,  조정에 사표를 안 내도, 그는 이미 산야에 가 있습니다.






곽상주를 읽으면서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랑 에른스트 윙거의 "숲 속 보행"을 같이 읽었는데 참 서로 어울리는 바이브인 것 같습니다(윙거는 유메스윌이 더 어울리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비관적인 허무주의자인 것 같은데 본인들은 인생이 엄청 즐겁고 행복할 것 같은.....




소동파가 아무래도 곽상의 장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다른 길을 걸은 것 같아 흥미롭더군요. 좀 더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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