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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쩌겠어요, 살아야지!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 갈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노라고…(후략)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장면 통째로 인용된 위의 독백을 보고 <바냐 삼촌>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안톤 체호프는 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이토록 묵직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위로의 말을 써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의 4대 장막극, <갈매기>, <바냐 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을 전부 읽어보니, 체호프는 사람들이 느끼는 비애를 너무나도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은 그토록 묵직한 위로로 다가올 수 있었다. 체호프의 4대 희곡은 전부 비슷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구성이나 등장인물까지도 유사하다. 네 희곡 전부 크게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가며, 인물들은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이 완전히 봉합되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인물들의 마음 속에 항상 과거에 대한 향수와 비애가 잠들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갈매기>는 네 희곡 중 가장 처음 발표된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그럼에도 나머지 세 편 이상으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날카롭게 묘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인물들은 자신이 집착하는 생각에만 빠져 있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교사 메드베덴코 같은 경우 남이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의 가난함에만 신경을 써, 읽다 보면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그에 더해 이들 사랑의 벡터는 그 방향이 맞는 것 없이 제각각으로 얽혀 있다. 메드베덴코는 마샤를 사랑하지만, 마샤는 트레플레프를 사랑하고, 트레플레프는 니나를 사랑하며 니나는 트리고린을 사랑한다.


다들 왜 이렇게 예민하지! 왜들 이렇게 예민한 거야! 웬 사랑이 이렇게 많아, 마법의 호수여! 하지만 아가야,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니? 무엇을? 무엇을?


이런 와중에도 주인공 트레플레프는 구세대에 저항하는 신세대로써, 자신의 어머니이자 배우 아르카디나와, 그녀와 동행하는 소설가 트리고린의 작품들을 깎아내리고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배우가 되려는 니나는 그의 페르소나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 끝에 니나는 작은 극단을 전전하는 삼류 배우가, 트레플레프는 한계에 부딪혀 점점 타성에 빠져드는 작가가 되었을 뿐이다. 니나는 야밤에 트레플레프를 몰래 찾아와 그와 함께 과거의 추억을 회상한다. 박제되어 버린 갈매기처럼 망가져버린 니나가 떠나자, 트레플레프는 자살하고 만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가 자살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또한 4대 장막극의 공통 주제인 과거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트레플레프는 미래를 바라보고자 했으나, 끝내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결국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듯이, 그는 과거에 자꾸만 빠져드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닐까.


<바냐 아저씨>4대 장막극 중에서 가장 강렬했다. 결론적으로 봤을 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불안하게 불만을 표출하던 바냐가 결국 폭발하는 순간과, 그 감정이 소냐의 독백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과정은 충분히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냐의 마음을 그토록 괴롭게 한 것은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이다. 그의 과거는 전부 교수 세레브랴코프에게 바쳐졌지만, 세레브랴코프는 별 능력도 없는 삼류 학자에 불과했다. 납득할 수 없는, 노력이 전부 보답받지 못하는 상황에 폭발해 버린 바냐의 분노는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반대편에서, 소냐는 역시 보상받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도 바냐처럼 분노하지는 않는다.


주세요, 바냐 삼촌! 난 삼촌 못지않게 불행하지만, 그래도 좌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내 생명이 스스로 다할 때까지 나는 참고 또 참을 거예요그러니 삼촌도 참아요.


그녀가 내린 해답은 참고 일하는 것이다. 일단 적어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기에. 그러면 언젠가는 하늘이 어여삐 여겨주지 않을까? <바냐 아저씨>는 이 지점까지 얘기하고 막을 내린다. 하지만 체호프는 이에 대해 <세 자매>에서 논의를 계속 이어나간다.


<세 자매>는 그렇게 참고 일하는 사람들의 무너지는 일상을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생각된다. 세 자매들은 처음에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뒤로 갈수록 지치고 무너지며 그녀들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3막에서 불타는 집들은 마치 무너지는 그녀들의 삶을 형상화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들은 미화된 도피처인 모스크바에 끝내 가지 못한다. 막내 이리나가 자신을 이곳에서 떠나게 해줄 것이라 기대해, 사랑하지도 않은 채로 약혼한 투젠바흐가 갑작스러운 결투에서 죽듯이. 모스크바는 그저 떠나온 과거일 뿐, 세 자매는 무너져버린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녀들은 묵묵히 견디기를 다짐하면서도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소리쳐 묻는다. 대체 우리의 삶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한 <벚나무 동산>에서의 결론은 모른다같이 보인다. <벚나무 동산>에서도 <갈매기>처럼 인물들이 모두 각자의 삶의 방식만을 바라보고 있어 대화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방식에는 전부 결점이 있다. 예로, 대학생 트로피모프의 삶의 이유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삶을 덜 경험한 사람의 치기로 보이기도 한다. , 마지막까지 <벚나무 동산>의 인물들은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똑같은 삶을 반복한다. 가예프는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실없는 독백이나 읊으려 하고 있고, 류보피 안드레예브나는 자신을 이용해먹은 애인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분명 달라진 것은 있다. 그들 추억의 장소인, 벚나무 동산이 팔리고 만 것이다. 벚나무는 잘리고 집은 무너지며 그 자리에는 별장들이 들어설 것이다. 가예프와 류보피 안드레예브나는 슬퍼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그들이 눈물을 훔친 채 마차에 오르는 것을 읽으면 체호프가 말하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삶의 이유를 모른다. 그저 삶의 방식을 알 뿐이다. 그것은 사무치는 과거에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그리고 멀리 동산에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만 들린다.


못쓴거 같아서 안올리려 했는데 관심받고 싶어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