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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쓴 인간의 기억력이 워낙 후진 터라 실제 소설 내용과 일부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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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건 독갤에서 츄라이츄라이하라고 들었던 롤리타를 고르러 도서관을 가서였음.

정작 고르라는 롤리타는 안 고르고 이 책을 고른 게 함정 ㅋ

서론은 이쯤하고.

1. 시점으로 멀미하기는 처음

글 보자마자 당황했던 건 시점이 시작부터 빠꾸없이 마구 바뀌더라.

시작부터 '다니엘은' 하다가 '나는' 하고 가다가 '그는' 이렇게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으로 마구 흩뿌리는데
알고 보면 이거 다 한 사람임 ㅋ

그나마 이 시점 흔들기가 적응될라 칠때 갑자기 플래시 백으로 넘어가서 1950년대를 보여줌. (작중 현재는 1967년.)

그러곤 또 1950년대랑 1967년을 또 마구 교차편집해서 보여주는 식임.

근데 문제는, 내가 2022년에 이 책을 읽고 있어서
1967년도도 역사고 1950년대는 겁나 먼 역사임 ㅋ. 그것도 남의 나라 역사.

안 그래도 한국과 미국이라는 문화적 괴리에다 최소 55년 차이 나는 시간적 괴리도 겨우 따라갈만 한데

여기다가 시점 마구 흔들고 시대 마구 흔드니까 초반부엔 도무지 분간이 안 가는 거임.


'낯설게 하기'라 그러는 것 중 시점만 움직이거나 시간선만 건드리는 건 종종 봤는데

두 개 다 미친듯이 흔들어대는 작품은 이걸로 처음 경험해 봄.


이 와중에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빠꾸없이 묘사하는 대목에서 유교맨으로서 으메리칸 스타일 감당 안 된 건 덤.


당연히도 이 모든 건 작가의 의도


어떻게 보면 이 멀가중을 통해서 다니엘에게 감정이입을 못하게끔 만들면서 작품 자체와 묘한 거리감이 조성되었음.

그렇다고 서사 자체가 안 굴러가는 건 아니라서 계속 쉬다 보다 쉬다 보다 하게 됨.


1950년대 버스 신에서 돌덩이 묘사하는 장면을 환상으로 처리하는 걸 본 이후에야 조금 읽는데 큰 난맥이 뚫리는 느낌이더라.


이 글 속의 글에서 중점은 '사실 그 자체의 기술'이 아니라 '사실을 재구성하는' 글이고,

그 과정에서 다니엘 스스로의 경험으로는 메울 수 없는 부분을 환상이나 개연성있는 허구로 채워 넣은 거라는 깨달음이 그제야 왔음.


2. 왜 하필 '다니엘서'일까.


물론, 이 글의 화자이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작중 글을 쓴 사람이 다니엘이라 다니엘서(The Book of Daniel)인 건 맞음.


근데 성경에서 나오는 환상문학이면 계시록도 있고, 에스겔서도 있잖음?

계시록을 따라서 쓰면 요한이니 존쯤 될 거고, 에스겔서면 에제키엘쯤 될텐데

에제키엘은 드문 이름이긴 하지만 아주 안 쓰는 이름도 아니고, 존은 길거리에 널린 '민준'이 급 이름 아님?

근데 왜 다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지 의문이었음.


(이 밑에는 그냥 개인적으로 느낀 의견임, 반박시 네 말이 맞음)


결론부터 말하면 일단 요한, 즉 존은 주인공 이름이 될 수가 없음. 계시록은 신약이니까.

여기서 나오는 아이작슨 일가는 유대계 미국인 집안이고, 유대인에게는 신약이나 쿠란이나 불경이나 별 차이 없음. 타 종교의 책일 뿐.

그런데 유대계를 주인공으로 하는 환상문학에서 주인공 이름으로 존을 쓴다? 이건 말이 안 됨.


그럼 에제키엘이 아니라 '왜 다니엘인가'만 남는데

그건 아마 다니엘서에만 나오는 특징 때문일 걸로 추론해봄.

에스겔서도 그렇고 성경 안에서 대부분의 환상문학은 자기가 겪은 환상을 직접 서술하는 사례로 점철되어 있음.

이 경우 환상의 기록자와 수혜자가 일치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환상을 보여준 사람과 환상을 해석하는 사람의 관계가 일직선상으로 표현됨.


반면에 다니엘서의 경우에는 전반부에 환상을 겪은 사람이 다니엘이 아님.

환상은 바빌론의 왕들이 겪고 다니엘은 조르르 달려가서 그거 해석만 해주는 사람임.

즉, 환상의 수혜자와 환상의 기록자가 각각 다르고, 환상을 보여준 사람과 해석하는 사람의 관계는 분리되어 있음.

이런 식의 관계 설정이 작가가 의도한 부분에 더 부합하기 때문에 '다니엘서'라고 이름붙인 거라고 일단 생각해봄.


3. 로젠버그 부부

이 소설의 핵심 사건을 하나만 꼽으라면 '아이작슨 부부 간첩 모의 사건'임.

근데 이건 '로젠버그 부부 간첩사건'이란 실화를 모티브로 한 거라 간단히 훑고만 가겠음.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정계는 핵뽕에 취해있었음.

핵을 만들고 떨궈 본 국가가 지들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90년대 미국마냥 짱 먹을 줄 알았겠지.

근데 몇 년 있다가 소련이 핵실험을 성공해 버림.

미국 내에서 엄청난 아노미가 덮치고 이게 '미국 안에 빨갱이 간첩이 있어서 그런 거다!'라는 움직임으로 번짐.

이걸 일컬어 '매카시즘'이라고 하는데 가장 열심히 선동한 ㅅㄲ 이름을 딴 거임. 이 ㅅㄲ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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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무튼 그래서 '어떤 놈이 핵 정보를 찾아서 소련에게 넘긴 쥐 ㅅㄲ냐'고 FBI가 혈안이 되서 찾기 시작함.

그 와중에 미국 공산당 당원이던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간첩이라는 증언을 받고 체포됨.

근데 다른 미국 공산당 인간들은 협조적이거나 관련자를 술술 부는데 이 양반은 당췌 불지를 않음.

똥줄 타는 FBI가 부인 에셀을 증언도 없이 체포함. 근데도 확실한 증거가 안 나오고 지식인들은 풀어내라고 난리임.

그럼에도 한국전쟁까지 나니까 미국 법원에서 1951년에 사형 선고 떄리고 53년엔 집행까지 마침.

그래서 한동안은 이게 매카시즘으로 인한 사법살인으로만 여겨졌던 게 정설이었음.

근데 1990년대 소련 기밀문서가 까지면서 남편이 간첩이었던 증거들이 속속 나옴.

부모의 무고를 주장하던 자식들마저 2008년에 아버지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면서 일단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간첩 여부는 일단락 됨.

그러나 부인이 간첩인지 여부와 남편이 핵 관련 기밀을 넘겼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임.

4. 눈총

다니엘은 이 글에서 부모가 간첩인지 알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세 가지 방향으로 눈총을 받는 상황임.

첫 번째 눈총은 유년 시절에 받은 '빨갱이 간첩 자식'이라는 눈총임.

매카시즘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시절인데 아이작슨이란 성을 유지하고 그 집에 그냥 살면
당연히 빨갱이 간첩 자식이란 소리 들을 게 뻔하지 않겠음?

이를 막기 위해 집안 친척(할머니)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나 친척은 애초에 둘을 맡을 생각이 없었음.

유대교 라이프스타일에 흠뻑 젖은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무리 손주 같은 애들이 불쌍해도
빨갱이 자식들인 이상 품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

그 탓에 다니엘이랑 여동생 수전은 보육원으로 갔다가 어찌저찌 해서 르윈 가에 양자로 입적함.

뭐 딱히 어른이 됐다고 시선이 호의적으로 바뀐 거 같진 않은데
이건 현재에서는 과거 아이작슨 부부 사건 당시 상황 설명으로만 나옴.

두 번째 눈총은 히피들에게 받은 '물렁한 부모'라는 눈총임.

월남전 영향으로 국가는 족구나 하라는 히피들 입장에선 얌전히 재판받고 무죄 주장했던 행위가 웃긴 거임.

그냥 반역 재판하겠다 그러면 ㅈ까라고 하고 재판 거부할 일이지 뭐하러 재판 하느냐고 언급함.

이게 그 전에 미국 공산당에서 아이작슨 부부가 손절당한 거랑 묘하게 이어지는 느낌이면서 또 약간 다른 게,
미국 공산당이 아이작슨 부부를 손절한 건 매카시즘에 자기도 휘말릴까봐 한 수동적 행위였는데
히피들은 왜 그냥 그 재판 자체를 불의로 규정하지 않았냐고 비난하는 능동적 행위를 하는 거임.

뭐, 이거 때문에 구좌파와 신좌파의 갈등을 보여주고 어쩌고 하는거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고 ㅋ

세 번째 눈총은 여동생 수전한테 받은 눈총인데
사실 이게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소설의 발단임.

그리고 이전에 두 가지 눈총이랑 다른 게
앞의 두 가지 눈총은 다니엘이 아니라 다니엘의 부모인 아이작슨 부부를 향한 눈총에 다니엘이 곁다리로 낀 거라면
이건 다니엘을 향한 눈총이라는 차이가 있음.

수전 입장에서는 히피들과 함께 아이작슨 부부 복권 운동도 하고 있는데,
오빠란 인간은 그냥 미온적이니 연 끊자고 편지를 보냄.

그런데 그 이후에 수전이 정신병동으로 들어갔다가 자살기도를 함.

그 이후에 다니엘이 진실을 찾으려 앞서 말한 히피도 찾고 그때 변호했던 변호사도 찾고 하는 식임.

근데 다니엘이 미온적인 건 다니엘이 경험한 부모의 언행과 관련이 있음.

다니엘이 보기에는 아버지는 사회주의적 경제체제에 경도된 상태였고 어머니도 그에 대해 딱히 부정적으로 보진 않았음.

그러니까 '그걸 마냥 틀리다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싶었던 게지.

물론, 다니엘이나 당시 변호사도 그 당시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음.

다만 혐의가 과장되었고 그에 따라 처벌도 과하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5. 진실의 봉인

다니엘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 자기 부모를 고변한 증언자, 셀리그 민디시를 찾아야 함을 알고 그 딸을 만나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함.
(이게 가능했던 건 그 증언자가 원래 같은 마을에 살던 치과의사였음)

근데 딸은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하는데, 이건 아이작슨 부부가 간첩이니까 아버지가 고변한 거라는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주장이었음.

그로 인해 고난을 받은 건 오히려 자신의 가정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집도 우리 집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강변함.

여기서 공정한 시선으로 보는 거 같이 묘사되던 다니엘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민디시 집안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디즈니랜드에서 민디시를 만나는 데 성공함.

그러나 민디시는 이미 아이작슨 부부의 진실에 대해 증언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이미 그가 중증 치매로 빠져버렸기 때문.

이렇게 해서 다니엘의 아이작슨 부부에 대한 진실 찾기는 결국 실패로 귀결됨.

6. 회색지대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건 작품이 판단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데 있음.

보통 이런 식으로 정치 논리 어디에도 포용되지 못한 경우면 그 피해자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보통이잖음?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연민의 태도가 드러나지 않음. 심지어 글 안의 글 집필자를 아들로 설정해두고서도.

이건 이 소설이 추구하는 게 그런 이분법적인 구도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았기 떄문이라고 생각함.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선악구도가 온전히 갈리는 경우는 거의 없음. 진실의 일면은 선이고, 일면은 악인 셈이지.

그런데 소설이나 극의 경우에는 그런 일면을 극대화하고 과장해서 내세우는 게 보통이잖음?

이 소설은 그러려고 들지 않고 진실의 모든 면을 까려고 다니엘이 노력한다는 점이 새로웠음.

사실 그러고도 영영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음.


초반부 멀미만 견디면 볼만하니 글 보고 관심 가면 찍먹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