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나는 이거 첨에 보르헤스랑 여행갔던 기록을 일일이 다 적은 논픽션 아닐까 하고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더라. 다만 실제로 50년 전에 보르헤스를 만나서 여행했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적은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라고 함. 저자 후기에서는 이걸 ‘보르헤스식 허구’와 가깝다 하고.
그렇다고 살을 붙여서 없는 내용까지 지어낸 건 아니고 실제로 자기가 몇 경험은 메모도 하고, 70년대 말에 몇 번 이걸 글로 써보려고 짧게나마 적어본 것들이 있어서 그걸 참고로 썼대나 뭐래나.
저자인 제이 파라니는 보르헤스를 만날 당시만 해도 그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함. 진짜 문학을 모르는 등신은 아니고, 글 읽어보면 걍 영미권 시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음.
암튼 보르헤스를 몰랐던 시기부터 시작하에, 초반부에는 저자가 보르헤스를 뭔가 미친 놈처럼 여기고 매우 버거워하는 서술이 눈에 띔. 꼭 자기 차 앞바퀴에 오줌을 싸질러댄다던가.. 툭하면 풍경에 대한 묘사를 요구한다던가.. 보르헤스 특유의 뭔가 판타지에 가까운듯한 발언 등등..
저자는 이런 보르헤스가 처음엔 그냥 노망난 남미 노친네…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가, 나중에는 그가 가진 깊은 사유가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는 걸 알고 존경하게 됨. 처음엔 사람들이 보르헤스를 보며 부모님이냐고 묻자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대답했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먼저 친구 혹은 부모님이라고 답을 하니까.
보르헤스도 당시엔 대학원생이던 저자가 맘이 들었는지 막 과거 썰도 풀고, 그와 차를 산초 판사와 로시난테라고 부르면서 막 이것저것 역사적 설명도 해주고 그럼.
하여튼 재밋는 썰들이 꽤 많음. 네스호의 괴물을 보고싶대서 네스호 근처의 호텔에서 보트를 빌려서 호수를 누비는데, 갑자기 보르헤스가 일어서서 괴물을 만났다면서 소리를 지르고 지팡이를 휘두르다 배가 뒤집혀졌던 일도 그렇고..
다 읽고 느낀 점은 이건 보르헤스를 안 읽어본 사람보단, 보르헤스를 읽어본 사람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더라.
일단 나는 보르헤스 작품의 스타일이 어떤지도 모르니까 중간중간에 보르헤스가 꺼내는 현학적인 말 중에 몇은 이해가 잘 안 갔음. 물론 무려 50년 뒤에 회상하는 글 속에서도 드러나는 보르헤스만의 세계, 작중 묘사로는 ‘그만의 도서관’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느꼈고..
읽어보면서 ㄹㅇ 글은 이런 사람이 써야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그걸 남에게 설득시켜서 무언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써야지..
사유도 빈약한 놈이 꼴에 문창과 졸업했다고 대충 유행하는 거 다 때려박아선 죽도 밥도 안 되는 법이고..
아무튼 보르헤스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속는 셈 치고 사서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음.
마지막으론 내가 갠적으로 정말 맘에 들었던 보르헤스의 말.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서건 미로로 들어선다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우리가 시작한 곳에 도착하게 되지. 그런데 그곳은 늘 우리 자신이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