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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고 내용 요약 및 내 생각정리 해봤음.
1 오늘날의 긍정사회
저자는 오늘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소비사회.
'좋아요'를 추구하는 긍정사회.
추가 배제된 위생강제사회.
이것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부정성이 배제된 긍정사회'라고 할 수 있다.
2 매끄러움
오늘날의 이러한 특성은 '매끄러움'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매끄러움은 거친것을 매끄럽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이게 바꾼다.
저자는 이러한 매끄러움이 오늘날에서 예술과 추, 지식의 관점에서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다.
예술에는 관찰자로 하여금 타격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부정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내면성은 탈신비화되고 긍정성으로 매끄럽게 된다.
이로써 미학의 비미학화가 일어난다. 예술은 대량생산되고 소비되며 내면의 심오함과 부정성을 잃어버린다.
추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더러움, 공포, 에로틱한 것은 위생적이고, 간접적이며 포르노적인 것으로 매끄럽게된다.
이로써 추의 소비화가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에로틱한것, 추하고 공포스러운 것을 그저 클릭 한번으로 위생적이고 편안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다.
지식과 소통의 관점에서, 특정한 저항을 통해 얻어졌던 지식의 불투명성과 신비함은 다시 매끄러움을 통해 탈신비화되고 가시성과 투명성을 얻게 된다.
이로써 지식과 소통은 오늘날에서 정보와 데이터주의로 다듬어지게 된다.
3 가속
그래서 이런 매끄러움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
매끄러움이 구현해낸 긍정성은 자본의 순환과 정보의 소통을 최대속도로 가속화한다.
예를 들어 소비되는 형태의 예술은 관찰자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통한 타격이 아닌 자아확신을 통해 소비를 촉진한다
또한 현대의 디지털 플랫폼은 차단과 구독기능을 통해 매끄럽고 가속화된 정보의 소통을 제공한다.
유튜브 쇼츠나 틱톡같은 영상은 알고리즘을 통해 추천되며 한번 클릭하면 다음영상으로 자연스럽게 물흐르듯 계속 넘어간다. 이런 형태의 영상은 오로지 높은 조회수만을 위해 매끄럽게 다듬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호흡이 길고 소화하는데 노력이 필요한 매체를 찾지 않는다. 대신 그것의 요약본이나 정리된 짧은영상만을 찾아다닌다.
4 반미학과 비미학
모더니즘 이래로 전개된 미학의 특성은 불일치, 모순과 부정성, 무의식, 우연에 집중하는 반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예술이 자본과 정보의 흐름과 결합되게 되면서 이러한 반미학적 성향은 자본과 정보의 속도에 걸림돌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부정성들은 매끄럽게 제거된다.
이렇게 다듬어진 예술은 타격보다는 그저 소비를 촉진시키는 역할만을 한다. 나는 이것이 저자 말한 미학의 비미학화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은 부정성을 통해 보는사람으로 하여금 타격을 주는 반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 베이컨 작품이 자본의 흐름과 결합되면 굿즈나 상품들로 대량생산되어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다듬어지고 작품의 부정성을 잃어버린다.
마찬가지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앞에서 셀카를 찍고 sns에 올리는 행동을 생각해보자. 이것도 결국 타격을 통한 자기부정이 아닌 '좋아요'의 추구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매끄러운' 예술의 예로 제프쿤스의 예술을 든다. 제프쿤스는 자기의 예술에서 사람들이 그저 '와!'라는 감정만을 느끼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풍선개>의 매끄러운 표면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며 끝없는 자기확인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아름다움의 구원
그럼 글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구원이 대체 무엇일까? 구원이란 종교적 의미에서 원죄같은 부정적인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제프쿤스 예술의 매끄러움은 아름다움을 부정성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상처와 책임으로부터 구원하고 순수한 긍정성의 세계를 약속한다.
저자의 구원이라는 단어 선택은 반어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경험'의 종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정한 경험이란 보는것, 생각하는것, 타자와의 소통을 포함한다.
6 생각:아름다움의 구원은 가능할까?
우선 나는 부정성은 예술작품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거의 밈처럼 굳어진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인물로 대표되는 변호사 아래서 필경사로 고용된 바틀비는, 변호사의 사소한 지시마다 항상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로 일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호사를 떠나지도 않는다. 변호사는 이런 '수동적 저항'이 자신을 미치게 한다고 말한다. 필경사 바틀비의 수동적 저항처럼 나는 우리 내부에 떼어낼 수 없는 부정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일단 세계에 던져진 대상이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기로부터 부정성을 찾아내는 일은 관찰자의 역할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대상에서든 거기로부터 무한한 종류의 관념들을 유추해낼 수 있고 그로부터 부정성을 이끌어내고 우리가 도달해야할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예술품 속에 부정성을 제거했다고 부정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매끄러움을 통한 정보와 자본의 가속이 이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부정성은 다른곳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며 나는 이런 부정성이 인간성에서 떼어낼 수 없는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읽고 ㄹㅇ 가슴이 둨큰둨큰 했는데 이 글 보니까 또 가슴이 두근거리네
좋은 글 고마워
본문에서 말하는 '매끄러움'을 ui ux 디자인에서는 고통을 제거한다고 표현함
ㅋㅋㅋㅋㅋ새로운거 알아간다 - dc App
바틀비 패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