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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기쁨의 윤리학은 불교와 상당히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불교: 외부에 집착하지 마라. '나'에게도 집착하지 마라. 너는 이미 부처다.


스피노자: 외부실재에 의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수동적으로 외부실재에 휘둘리면 외부세계의 조건에 따라 기쁨과 슬픔으로 휘둘리게 된다. 그러니까 스스로, 능동적으로 기쁨을 산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가변적인 세계에서 인간은 외부세계의 조건의 변화에 따라 기쁨과 슬픔으로 이리저리 휘둘리게 된다. 외부세계를 어느정도 컨트롤할 수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거기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나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이미 부처다. 이 의미가 뭘까? 불교를 깊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정서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코나투스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과 외부세계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갖게 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깨닫지 못한 수행자들은 산 속 토굴로 들어가 돈, 명예, 사랑과 인연을 끊음으로써 외부실재에 휘둘리지 않는 자아를 만들려고 한다.


애초에 산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 자체부터가 외부실재와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들은 자신이 외부실재에 휘둘리는 존재이기에 산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외부실재에 무관심함을 증명하고, 성취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산 속이라는 극단적 빈곤의 환경에서도 자신은 고통에 신음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임을 원하고 확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 하산하는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이 산 속에서도 고통이 가득하면서 좌절하면서 하산하는 경우가 있고,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면서 하산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외부세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왕 내가 산다면 외부실재가 주는 수동적인 기쁨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속세에서 사는 것이 좋으니 하산하는 것이다. 후자는 어떤 경우인가? 후자는 '깨달은 상태의 나', '고통 없는 상태의 이상적인 나'를 가정함으로써 거기에 집착해 내가 현재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지금 나의 상태를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미래의 이상적 자아와 비교한 열등감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부처다. 내가 '미래에 모든 고통에서 초월한 신선이 된 나'라는 헛것을 보고 있느라 내가 부처인 것을 몰랐을 뿐이다. 다시말해, 부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부처는 모든 고통에서 초월한 신선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슬픔이 수동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나의 힘을 증대시키는 외부실재와의 헤어짐 또는 나의 힘을 감소시키는 외부실재와의 대면에 의해 슬픔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서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스피노자는 이 슬픔의 정서를 다른 기쁨의 정서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슬픔과 기쁨은 모두 힘을 증대시키기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슬픔이라는 정서 자체를 다시 느낄 수 없도록 거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조건적으로 슬픔을 느낄 가능성이 항존하는 존재자이다.'는 사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실에 집착하는 순간 나는 불안이 떨게 된다. 그리고 '조건'에서 아예 벗어나고 싶어하게 된다. 이와 같이 조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두 종류다. 나를 바꾸거나, 세상을 바꾼다. 전자는 자신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금강불괴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고통이 없는 내세를 가정하는 것이다.


참다운 깨달음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다운 깨달음은 '슬픔'과 '슬픔을 유발하는 본질을 갖는 자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슬픔을 기쁨의 정서로 대체시키려 하지 않고 계속 부여잡고 있는 것,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 불완전한 범부라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슬픔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우리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슬픔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역설이 일어난다.



다시 돌아오자. 왜 어떤 수행자는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면서 하산하는 것일까? 내가 '슬픔'과 '슬픔을 유발하는 본질을 갖는 나'에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산 속'이라는 공간은 의미를 잃는다. 더 이상 억지로 산 속에 있으면서 인간의 본질인 욕망과 정서를 부인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이 바뀌면 저신은 인간으로 실존할 수 없다. 내가 범부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특성은 알고보니 부처도 나와 똑같이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본질을 부인하기 위한 공간인 '산 속'에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산 속'이라는 공간은 수행자에게 빈곤과 단절의 고통을 부여하는 공간이다. 그 빈곤과 단절에도 개의치 않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갔지만, 수행자가 깨닫는 것은 '개의치 않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수행자에게 빈곤과 단절은 '수행'이라는 위대한 행위에서 '자해'로 격하된다. 그렇기에 그는 산에서 속세로 나왔다. 그는 이제 슬픔을 붙잡지 않고, 이상적인 자신을 붙잡지 않는다. 그는 '개의치 않는 것'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는 속세로 내려가서 많은 일들을 겪을 것이다. 일하다가 상사에게 욕 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계속 붙잡고 괴로워하지 않고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맛집투어를 간다거나 하면서 그 슬픔을 다른 기쁨으로 대체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지 않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다. 꿈을 꾸면 현실의 나는 결핍된 것이 된다. 그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나'가 남긴 정신의 흔적이 나를 괴롭힌다면 나는 그것을 그저 새로운 정서로 대체시키려 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원대한 목적(사실은 인간의 본질 규정을 거스르는 일로 밝혀졌지만)이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기쁨의 정서를 추구하는 일이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영속적으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가 산 속에 가기 전, 그리고 산 속에 머물 때, 그리고 갔다 온 후 바뀐 것은 무엇인가? 맨 앞의 경우에서 그는 고통을 꽉 쥐고서 놓는 방법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였고, 중간의 경우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하면서 고통을 자신의 본질에서 퇴출시키려고 하는 모순적인 존재였고, 마지막의 경우에서 그는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을 손에 꽉 쥐지 않고, 고통의 관념마저 손에 쥐지 않고 놓아주고 새로운 기쁨을 찾아다니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주관적 사고, 즉 고도의 상상력, 추상능력으로 이상적 자아를 그려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바라본 것이 세계의 본질은 아니었다. 원효가 지적하듯이, 인간의 언어적 사유, 즉 추상적 사유 또는 이성적 사유는 인간이 개념적으로 구성한 상상의 세계와 세계의 본모습을 분리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해 형이상학적, 상상적, 가정적 사유(통틀어서 이성적 사유라고 할 수 있겠다.)를 멈춰야 한다. 본질은 지구의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모든 부분은 각자 조응하여 지구라는 개체를 이룬다. 우리는 하루하루 행복을 쌓아가야 하는 존재이지, 완벽한 상상의 행복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완벽한 상상 속의 행복은 내세의 천국이라는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인간은 이성이 너무나 발달하여 '기쁨'만을 추상하여 이를 절대화하였기에, 우리는 거꾸로 더더욱 빈곤해진다. 포이어자흐가 말했듯이 신이 부유해지려면 인간이 빈곤해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지금 당장의 부유함을 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