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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나는 독자로써 감상문을 썼다. (비평문을 쓸 수 있는 능력도 동기도 의지도 없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되는데, 싫다고 말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나는 썼다.

(싫은 것을 억지로 본다는 일은 힘든 노동이기도 하고, 싫은 것에 나쁜 영향을 받을 지 모른다는 근묵자흑의 불안과 두려움이 컸다.)

먼저 '시'를 이루는 구성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앞서 쓴 글을 통해 정리하고, 그것을 이번에 읽은 김중식의 시집에 적용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들이 (적어도 내게는) 남아 있어서, 그 또한 필연적으로 같이 이어져 글이 길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서론이 쓸데없이 너무 길다.

목차

1. 시적인 동기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동력이란 무엇인가.

3. 잘 팔리는 시의 문학적 딜레마

4. 다시 김중식으로 돌아가서ㅡ,

5. '울지도 못했다'의 '시'가 실패한 이유

6. 왜 본 시집의 시 대부분이 시로서 실패하고 자기 복사에 지나지 않았을까?

7. 실패와 자기 반복의 결말.

8. 이 감상을 남기는 이유.

9. '노래가 되지 못한 시와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0. '한 시집에서 다음 시집 사이'




1. 시적인 동기란 무엇인가.


저번의 김선우의 '녹턴' 감상에서, 시인의 무신론적 신앙이 시를 가능케 한다고 나는 썼다.

: 여기서의 신앙이란, 종교적으로 신을 믿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사전적인 의미로서,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고 가르침을 지키며 이를 따르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시적인 신앙의 형태와 성질은 정해지지 않은 것이어서, 멸망이나 타락, 쇠락 따위의 개념도 신앙이 될 수 있다.

이 논의에서, 프로파간다는 논외로 한다. 프로파간다가 어쨰서 예술이 되지 못하는지, 혹은 저급의 예술이 되고 마는지에 대해서는 읽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글을 열어야 한다.)

그러한 무신론적 신앙이 그녀의 시적 동기라고도, 나는 썼다.

김중식이 25년 만에 펴낸 '울지도 못했다' 또한 비슷한 구조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녹턴에서의 김선우가 무신론의 신앙자라면, 울지도 못했다에서의 김중식은 불신앙자(不信仰者)이다.

이러한 시적 테마, 혹은 삶의 테마의 차이는 그저 개인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고, 당연한 것일 테다.

그러나, 그러한 김중식의 불신앙은 시를 가능케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불상사를 낳는다.

그 이유 또한 내가 저번에 써낸 문장으로 설명하겠다.


2. 시적인 동력이란 무엇인가.


'현실에 발을 딛는 불신의 순간, 그녀의 시는 흔들린다.

그리고 그녀가 사력을 다해 그 순간을 버텨내는 한, 그 충돌에서 시적인 동력은 발생한다.'

자기 바깥의 예측할 수 없는 무언의 충격과 사건 그리고 자기 안의 무명, 혹은 유명의 셀 수 없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 놓인 무력한 인간으로써,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시인은

시적인 신앙='시적인 동기'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신앙이 실재하는 세계와 부딪혀 발생하는 충돌의 에너지에서 '시적인 동력'이 발생한다.

그 시적인 동력이 '시'라고 불릴 만한 사유와 표현을 가능케 한다.


3. 잘 팔리는 시의 문학적 딜레마


시적인 동기와 시적인 동력.

이것이 단지 아무렇게나 갈겨 써도, 줄 띄움만 몇 번 하면(혹은 하지 않더라도) 시가 되고 만다는 시의 형식에 불구하고,

시가 시로써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며,

'하상욱이나, 나태주 같은 대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제의 시인들을 왜 과소평가 하나요?' 라는 질문에 시를 읽는 독자가 쉽사리 대답하기 쉽지 않은 딜레마의 정체이자, 그에 대해 내가 내린 해답에 가깝다.


4. 다시 김중식으로 돌아가서ㅡ,


그러나 '울지도 못했다에서의' 김중식은 단지 무신론자가 아닌, 무신앙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반복하자면) 불신앙자에 가깝다.

그는 고통에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시인이라고 불릴 만한, 시라고 불릴 만한 사유와 표현을 가능케 하는 시적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 '울지도 못했다'의 '시'가 실패한 이유


'울지도 못했다'에서의 김중식의 자아는 여행자이다. 그는 국내외의 온갖 오지를 탐험하며 글을 썼다.

그러나 여행자는 결국 방랑자이고, 구도자이며, 최악의 경우에서는 그저 도피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김중식의 여행 혹은 방랑이 그 중 최악인, 도피에 불과한 3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도피가 최악인 이유는, 그것이 결국 허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겠다.)

1) 본 시집에서의 내용 만을 한정하면, 김중식이 진단하는 세상의 지옥은 자신의 내부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다.

비록 문단으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방랑자로써 상징적인 시인이었던 '류시화'를 예로 들어보자.

류시화 또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탐구하기 위해 방랑을 시작하였지만, 류시화의 지옥은 자신의 외부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기인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류시화는 자신의 방랑에서 구도자로써 시적 신앙을 가지고 시를 쓸 수 있었다.


2) 김중식의 지옥이 외부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마찬가지로 외부적인 세상의 지옥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시인이 있는데,

그 중에 '심보선'을 예로 들고 싶다. 심보선은 자신 외부의 지옥에 대하여, 실제적인 행동으로 저항함으로서 현실 도피와 그로 인한 영혼의 부패를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시 만을 참조하여 나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중식은 자신의 지옥이 외부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혹은 그의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서) 그 얼어죽을 놈의 사막이니, 등산이니 하며, 저 멀리 보이는 세상을 비판하고 경멸한다. 적어도 이 시집 안에서 그는, 철저히 관찰자, 방관자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외부에 실재하는 지옥에 대항하려는 일말의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 김중식은 시인의(혹은 인간으로써의)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다.


3) 결과적으로, 시집 도중 결국 김중식의 '헛웃음이 나는' 현실 도피적인 '오지 관광'은 이러한 모순점을 안고 침몰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그는 단지 삶이라는 지옥의 테두리를 걷고 있던 도망자에 불과했으므로, 혹은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못한 돌원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시인이 직접 자신의 글로써 (차마 이것을 시라고는 말하지 않고 싶다.) 표현하는 것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지옥이었으며,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그는 이미 궁지에 몰렸으므로 남겨진 선택지는 무수히 자기 복사를 반복하는 것 뿐이다.


6. 왜 본 시집의 시 대부분이 시로서 실패하고 자기 복사에 지나지 않았을까?

1집에서 독자들의 찬사를 받던 김중식은 이렇게 부패하여, 시적인 동기도, 시적인 동력도 갖추지 못한 채로 '빌어먹을 놈의 낙서'를 한다.

그 분량이 시집 한 권이 될 때까지 해서 나를 괴롭게 했다. 망할 놈의 새벽 4시였단 말이다.

그는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이것은 추측일 뿐이지만, 이 분은 그냥 자신 영혼의 부패를 감추기 위해ㅡ'행동하지 않으며 그것을 회피함으로서' 문드러진 자신의 자아를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자신이 이미 시작부터 그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을 이 '오지 관광'의 모순점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결국, 김중식의 이 시집에서 그나마 '시'의 요건을 충족한 시는 3개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자기 복사에 불과하다. 혹시 저산소증에 걸렸을 때 쓴 시일까? 싶었을 정도로 미완된 글도 있다.


7. 실패와 자기 반복의 결말.


하다 하다, 지옥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성을 포기하고 일종의 불륜적인 사랑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불륜이라는 명확한 암시는 없으나, 그 불타는 정열을 마누라한테 바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근데, 세상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 외부에서의 지옥을 회피하며 고뇌하는 척 관광하다가, 결국 다 포기하고 동물로 회귀해버리기까지 하면, 정말 인간적으로 이상해보이는 거다.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 내가 더 이상한 새끼라는 거.)


8. 이 감상을 남기는 이유.


뭐 남들 맘에 드는 글을 써보자는 것이 아니다.

(내 빌어먹을 병적인 인정 욕구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김중식이라는 서울대 나온 부패한 영혼을 비난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이미 화재가 난 집에 불 붙은 성냥 개비 하나 더 던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저렇게 될까봐, 저렇게 살까봐, 그냥 막연하게 이 사람처럼은 살지 말아야겠다. 라고 했다가는 무의식적 점화 현상에 의해서

내 두려운 다짐이 일종의 자기 최면에 불과해질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시인의 부패에 대한 나의 설명을 아쉽게나마 글로 남긴다.

(감상을 부탁했던 갤러에게 정말 진심으로 사과의 표현을 남기고 싶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험하게 싫어할 줄은 모르셨을 겁니다.)


9. '노래가 되지 못한 시와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의도치 않게 소중한 결실을 나는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처음 내가 마주친 후부터 오랫동안 호기심을 갖고 찾아 헤매었던 시구의 의미이다.

'노래가 되지 못한 시와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시를 읽으면서도 생각하고, 쓰면서도 생각하고, 안 읽고 안 쓰면서도 생각했다.

안 생각할 때도 있어서,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쓸려 무언가를 부드럽게 드러내는 것처럼)

노래는 '신앙'*의 은유이다. 혹은 환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유사성과 연관성이 공존할 수 있겠다는 나의 이해가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다.)

가끔 독서갤러리에서 현대에 이르러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특정한 지점이 과학적으로 틀렸다고 증명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철학을 왜 읽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철학이 과학에게 자신의 많은 영역을 빼앗긴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겹치는 분야에서 어떤 철학들은 결국 과학적 검증이 없는 이론에 불과하므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현재의 관련한 과학적 기준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부분적으로는 틀린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철학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고, 깊은 인상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삶으로 직접 빚어낸 신앙이 그들의 철학을 노래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진정으로 믿고 그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삶의 기록들이 그들의 철학을 노래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과학적인 사실보다도 직접적인 삶을 통해 노래가 된 철학에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의 SF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은 말했다.

"SF 작품의 90%는 쓰레기이다. 하지만 SF 뿐만 아니라 장르를 막론하고 발표되는 모든 것의 90%가 다 쓰레기이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미국의 철학자 다니엘 데닛 또한 ‘물리학이건, 화학이건, 사회학이건, 음악이건, 락음악이건, 컨트리 음악이건.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래, 망할 놈의 쓰레기가 많다. 내 눈을 불태우는 쓰레기들.

시라는 '글'에 있어서

최악은 기술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시가 되지 못하는 글들이다.

그보다 나은 것은 시단에 나와 제대로 출판되는 대부분의 글들, 기술적으로는 잘 학습되어

완성되거나 탁월한 지점에 올라 있지만, 시인 자신의 '신앙'이 담겨 있지 않은 시들.

기술과 신앙, 그 두 가지 차원에서의 '시'를 동시에 충족하는 글을 써내는 '시인'은 희소하다.


10. '한 시집에서 다음 시집 사이'


마지막으로 녹턴의 시구를 하나 인용하고 마치려 한다.



여기까지 와도 여전히 길은 멉니다

본래 먼 것이...... 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이라는 듯

또 얼마나 멀리 걸어야 하는 겁니까?

(시인의 생도 마찬가지요

한 시집에서 다음 시집 사이를 어떻게 살아냈느냐, 이로써 가름됩니다
살아 있기가
끝없이 멉니다)

한 걸음씩

지금 여기에서

오직 한 걸음씩


-om의 녹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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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컷으로 표현하는 시집의 외부에서 드러나는 내러티브. (시집 내부에서 형성된 것은 나쁘게 말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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