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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지금 당장은 마치 엄마가 죽지 않은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기정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식적인 모양새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워낙 유명해서 책을 제대로 읽어 보기 전까지는 잘 눈치채지도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충격적인 도입이 아닐 수가 없다. 엄마가 죽었는데 그게 어제인지 오늘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하다니. 뒤의 문단을 조금 더 읽고 나서야 그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 무엇이든지 적절한 절차가 필요하듯이, 주인공 뫼르소는 죽음에도 절차가 있다는 듯이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은 사회적 시선으로는 당연히 슬퍼해야 할 사건인, 소중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지만, 그 거친 사실을 접한 순간에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사실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유명 배우가 죽었을 때였는데, 놀라기보다도 영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한테 그 뉴스를 알려드리니, 너무 놀라셔서 오히려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 때 내가 웃었던 이유를 스스로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당연히 이상한 반응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이 나면 자신이 반사회적 인간인가 싶어 고민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뫼르소가 엄마의 죽음에 보이는 반응도 어렴풋이 납득이 갔다. 사람의 마음이 꼭 사회가 원하는 감정을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부정()형이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또한 아내가 죽은 직후에는 아무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면 뫼르소처럼 어머니의 죽음에 좀 지치고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자연적으로도 죽음은 삶이 있으면 반드시 존재하는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죽음은 슬픈 일이(어야 하), 그렇기에 뫼르소가 보는 장례식은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슬픔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회적 의식이다. 그렇기에 그는 엄마는 어제 죽었지만, 사실 장례식이 치뤄진 오늘에서야 비로소 죽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총알들은 깊이 들어가 박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결국 <이방인>에서는 세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의 죽음이다. 어머니는 자연적인 죽음 이후에 장례식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아랍인은 총알 한 발을 맞은 후에, 네 방 더 맞아 죽는다. 뫼르소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사형이 선고되어 운명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뫼르소의 입장에서는, 혹은 <이방인>에서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전보, 총 한 방을 맞은 아랍인, 단두대에서 잘린 뫼르소의 목은 아무 의미도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 네 발의 총알, 사형 선고가 있었기에, 사회 혹은 인간이 죽음을 결정지은 후에야 그들은 진정으로 죽은 것이다.

 

<이방인>에는 뫼르소 외에도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상남자처럼 행동하기 위해 뫼르소한테 이런저런 상담을 들어가며 여자를 때리는 레몽, 죽은 부인이 남긴 개를 사랑하면서도 매일같이 욕하고 때리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후회하는 살라마노 영감, 자신을 사랑한다고 즉답하지 못하는 뫼르소와 결혼을 약속하는 마리까지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내면적인 모습이 서로 상충하는 느낌이 든다. 뫼르소는 그들과 다르게 자신 그대로를 사회에 내보여주는 이방인이지만, 본질은 같은 인간이기에 그들을 거짓 없이 대하면서도 문제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사회가 지은) 감옥에 갇힌 후에는 자유를 빼앗긴 채로 그런 일상들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면회 장면을 읽을 때는 큰 소리를 질러야 겨우 남에게 진심의 표층이라도 전달될 지 알 수 없는, 사회 속 사람들의 거리가 시각화 된 것만 같아 슬펐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뫼르소는 죽음을 앞두고 부속 사제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분노의 독백 속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어떤 결의를 보이면서도 여전히 타인의 운명(죽음)에 무관심하다. 그럼에도 그는 죽음을 슬픔이라는 정해진 틀에 가두지 않기에, 끝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관심했기에 죽음을 정해진 끝으로 여기지 않고,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아직 볼 수 있었다. 사회(혹은 인간)이 자신에게 죽음을 부여한 상황에서 뫼르소는 끝내 (죽음을 바라보는) 자연의 시선을 되찾았다. 그는 더 이상 죽음으로 고뇌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마지막 처형장에서 증오의 함성이 들리기를 바란 것은, 다른 이들도 그의 죽음을 슬픔에 가두기보다는 차라리 분노하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기를 바라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