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장: 서론을 제외한 실질적 1장인 2장에는 조선 이전 시대의 우주관과 천관(天觀)을 설명하고 조선 초기 이후 성리학적 우주관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불교와 도교는 물론 성리학 이전의 유학에서도 동중서 등의 영향을 받아 인격천관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성리학이 여말선초에 도입되고, 성리학자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면서 인격천관이 리법천관(理法天觀)으로 바뀌게 된다. 저자는 김시습의 경우를 예시로 들고 있다. 김시습은 불교, 도교의 인격천을 비판하며, 성리학적 이법천관을 내세울 것을 주장하고 있다.
김시습의 우주관은 조선초기 이래의 혼천설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이는 권근의 천론이나 이순지의 『제가역상집』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성리학적으로는 주자의 좌천설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천설은 천구는 좌선(동-서)하며 일월오성은 우선(서-동)한다는 주장이다. 좌천설은 일월오성도 천구를 따라서 돠선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와 비교하자면 우천설이 사실에 가까웠으나 주희는 구조론, 생성론적 관점과 성리학의 인간중심적 사유에 맞는 좌천설을 주장해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이법천관은 율곡 이이 대에 이르면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3장: 3장에서는 조선의 사상계에서 심학(心學)의 위치와 이로 인한 천관의 변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6세기 말 각종 부세 문제가 심화되고 양명학이 조선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이법천관과는 다른 천관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수광이 있다. 이수광은 양명학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기존 주자학의 심성론이 군주성학론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현실문제의 해결에는 다소 소극적인 면을 보이자 이수광은 자연문제의 탐구를 통해 도덕원칙의 확립을 추구하던 기존 성리학의 입장과 달리 자연천과 도덕천의 분리를 통해 인사(人事)를 인간 주체의 문제로 치환하고자 했으며, 이 같은 심학적 경향은 실천성의 증대를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이었다.
4장: 4장은 조선 후기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역서학서로 인해 서학적 세계관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변화하는 양상을 다루었다. 서양의 우주관은 성리학적 우주관과는 달랐으며, 정부에서는 정확한 역법 개정을 위해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은 시헌력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한역서학서와 함께 들어온 세계지도는 『직방외기』의 유입과 함께 기존 성리학적 우주관에 대한 여러 논의를 성리학자들이 하도록 만들었다.
성리학의 오행설을 부정하는 서학의 사행설은 여러 논란을 가져왔으며, 새로 유입된 서학의 우주관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남인계 학자들만이 아니었다. 서인계인 최석정도 서학의 영향으로 태극도설을 비롯한 성리학적 우주관에 관련된 서적을 읽으며 성리학적 우주관에 대한 재검토를 했으며, 이는 주자도통주의를 고수하던 노론 계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석문은 당시 유학자들 중에서도 주목되는 인물로, 서양 우주관의 영향을 받아 기존 성리학적 우주관에 대한 보완을 시도하였다. 비록 그의 우주관 역시 기존의 역학적 우주관 속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서양의 우주관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성리학적 우주관에서 일부나마 탈피했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 두고 저자인 구만옥은 “김석문의 우주관은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252쪽)
5장: 5장에서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우주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우선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주자도통주의자들은 주자의 우주관을 절대시했다. 송시열을 이은 권상하와 한원진, 이항로에게서도 이는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론 중에서도 호론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당시는 주희의 우주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게 따라오던 시기였고, 이항로의 시기에 이르면 서양 문물의 수용은 필수적인 교양이 되어 있었으나 이항로는 끝까지 서양 기술을 거부했다.
주자도통주의자들은 주희 우주론의 모순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주희의 실수로 여겼으며, 서학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자도통주의적 관점에서 서학을 바라보았으며, 따라서 새로 도입된 시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며, 대통력을 긍정하였다.
이들은 주희를 따르고 이를 통해 조선의 국가재조를 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기에 이들이 새로운 서학의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수빆에 없었다.
이는 영남 남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영남 남인은 주희 우주론의 모순된 부분을 독자적인 역학 연구를 위해 보완하려 했다. 비록 이들 역시 서학의 천문, 우주관에 대해 비판적이고 무지하였으며, 성리학자로서 주희의 우주관을 긍정했지만, 독자 연구를 통해 우주관을 정립하려고 한 노력은 조선 후기 우주관 변화라는 측면에서 분명 평가받을 만하다. 개인적으로 이 장은 수식이 많고 그림이 많아 집중이 잘되지 않았으며, 역학에 대한 설명이 많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6장, 결론: 6장에서는 서양의 우주론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주자학적 우주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재검토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근기남인의 대표학자이자 훗날 성호학파를 통해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는 성호 이익은 서학의 기술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주자학의 이념적 우주관에 비판을 가했다.
그는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 자연관의 근간이 되는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을 해체시켰다. 이익은 사물의 개별성 개체성을 긍정하여, 한 사물에 적용되는 리(理)가 다른 사물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결론, 489쪽)
양명학을 탐구했던 정제두 역시 양명학에서 강조했던 심(心)의 탐구 즉 실심(實心)의 탐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는 실사의 탐구, 더 나아가 실리(實理)의 탐구로 이어져 주자학적 우주관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홍대용 역시 주자학적 우주관을 부정했다. 그는 당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세계지도와 서학서의 영향으로 인간중심의 절대적인 주자학적 자연, 우주관을 버리고 상대적이고 자연 중심적인 기(氣)일원론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전설을 주장하며 기존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한 발 더 멀어졌다.
저자 구만옥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홍대용이 주자학적 신분질서에 대해 상대적으로 사고하며 능력 위주의 사회개혁론을 펼쳤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소 급진적인 의견 같다. 하지만 홍대용이 주자학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에서 더 나아가 이 책에서 다룬 지식인들 중에는 가장 서양의 자연관과 유사한 사고를 했던 유학자였다는 데에 홍대용이 가지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조선 사회에 서학이 도입된 이후, 서학의 영향을 받고, 주자학적 우주관에 비판을 가했던 지식인조차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후기 서학 수용의 근본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