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예수의 십자가형을 말하며, 자신이 상상하는 제자들, 예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 그서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그는 안티크리스트에서 그 자신이 대답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였다"라고.

니체의 붕괴가 야기할 수 있는 모든 해석, 모든 주석은 니체가 자신의 출발시점에서 지적한 이아이러니의 기호 아래 남아 있을 것이다. 니체는 언제부터 심연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는가? 1888년 말부터 1889년 초 사이에 ㅡㄱ가 갑자기 광기에 휩싸였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도 거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광기가 분명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시점부터, 확실하게는 1887년 말부터 니체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을 주장하는 자들이라도 니체가 문헌학 교수였다는 현실과 철학자로서의 그의 진지함만은 믿는다. 어느 쪽도 지성의 충만한 행사라는 시선에서만 니체를 인정하려고 하고, 그런 시선에서 니체의 이어지는 선언들을, 설령 그것들이 모순적이더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선언들에 대해서는, 이것들이 니체를 동시대의 사상적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지의 여부에 따라서만 논의에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양측 모두가 니체가 토리노에서 보여 준 최후의 광경에 감동을 받아서, '종경' 직전의 작품들, 불균형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최후의 작품들 안에서 어떤 비인관성/비논리의 흔적을 앞 다투어 찾는 것은 이런 관점들에 의해서이다. 니체의 병력은 말하지 않은 채로.

니체의 생애에 대한 여러 증인들은 그의 이른바 병적인 경향들에 대해서 증언을 했다. 최후의 '명석했던' 10년 동안 니체에게 가장 성실했고 가장 신뢰를 준 오버베크는 아주 신중하게 니체의 붕괴의 요인들을 탐구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마도 광기느 니체의 고유한 삶의 방식의 산물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소심한 가설일 뿐이다. 왜냐하면 광기로서의 광기가 엄밀히 말해서 생활방식의 산물이 될 수 있다면, 광기가 생활방식의 기원이라는 것이 더 확실할 때,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만약 처음부터 한 정신이 이성과 광기 사이에 그어진 경계들을, 인식의 관점에서 명백한 착오라고 간주하고, 광기의 사용을 유보하는 한에서만 이성에 동의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