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신념을 가진 자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정도의 사상적 토대를 통하여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고찰, 고뇌를 하여 어떠한 허상에 사로잡히는 행위가 과연 올바른 행위인가?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행위인가? 오히려 깊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자연스레 섭리에 맞게 행동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짓밟고 올라선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ㅡ내가 말하는 것은 "죄의식을 느껴라"가 아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섭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행위 이기에 정답지에 가까운 해답인 셈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살아남기 위한 조건으로서 포식자의 위치에 선다. 그렇기에 생존 하는 것이며 그것을 '생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끊임없는 고뇌와 성찰을 통해 도달한 깨달음은 주어진 섭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자살행위이다. 섭리의 올바름을 깨닫고 그것을 우상으로 삼고 행하지만, 고뇌와 성찰을 통해 부가적으로 발생한 인간의 죄의식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촉매제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부정, 부정 끝에 도달하는 초인적인 존재에 대한 갈망. 자기 자신이기를,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넘어서려한다.

니들은 그런 생각한적 없냐? 그것은 실현 가능한가?

의미 없는 허상으로서 존재가 아닌가?

쉽게 말하자면 자신을 향한 과도한 채찍질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인간의 한계지점은 명확하다.ㅡ다음세대, 후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현존하는 인간의 한계지점을 말하는 것ㅡ나 자신을 부정하고 부정하며 부정하는 행위의 끝은 위버멘쉬에 도달하는 길이 아닌, "현재의" 나 자신을 죽이는 행위이며, 그 결과는 초인이 아닌 파멸이다

끊임없는 고뇌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현존하는 자신의 파멸을 인지 하면서도, 그 행위에 대한 찬사와 자기복제를 지속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체계에 대한 사랑에서 온다. 체계에 대한 불신이 체계에 대한 사랑이다.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가장 좋은 체계의 합리적 선택을 위한 기저로서, 그 행위는 멈춤을 거부하는 오르간처럼 영원히 작동되어지는 것이다. 즉 완벽에 가까운 체계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부정하고 추구하기를 반복하는 것. 니체의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칸트는 이 지점에서 니체와 부합한다. 이성으로서의 이성의 비판. 자기자신에 대한 불신이며 자기 파괴행위.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순수이성비판. 인간은 극복되어야할 그 무언가다 라는 계몽의식.

니체, 칸트, 도스토예프스키는 결국 파멸의 길을 선택하였다.

저 셋의 공통점은 자기파괴의 길을 건넌 결과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나는 나를 죽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