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 익히 들어왔지만,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우생학부터 염세적 공리주의까지 너무 중구난방이라 한 번 읽어봄.
근데, 이 사람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은,
결국 이 사람의 전제에 동의한다면 패러다임에 갇혀서 어떠한 반론도 없는 무결점 논리가 완성됨.
단순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어남으로 얻는 고통이 얻는 행복보다 확실하고 더 클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이게 맞나? 심리적 편향은 부정적인 면에도 적용되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론이 문제를 해결하자는건지,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을 없애자는 건지 모호하게 들렸다.
태어날 사람의 이익이 우리가 평가할 수 없는거라면, 태어날 사람의 고통 역시도 우리가 평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공리주의적 가치론을 따르면서 공리주의와 극도로 거리감을 두는 것도 이상하고... 흠
베너타가 말하는 비대칭성은 꼭 삶의 고통이 쾌락보다 크고작은지가 중요하다기 보단 걍 고통을 쾌락으로 상쇄시킬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죄악이라는 얘기고,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성질을 비교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쾌락과 고통을 저울질할 수 있다고 주장하니 어떤 이유로든 반출생주의자들이 동의하긴 어려움
그렇다면 베너타의 논리는 고통의 가치평가(고통은 절대적으로 나쁜 것)에 대해서 동의해야 수긍할 수 있는 논리 아님?
머 공리주의자 포함 그런 베너타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체고 다른 사람의 삶의 계획에 타인이나 다수의 이름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자들에겐 거부하기 힘든 논리인 것도 사실임.
윤리학은 공부를 해도해도 모르겠어... 애초에 답이 없는거겠지
윤리학에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를 가지고 접근하기 보단 이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다른 어떤 전제들에 동의하고 부정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게 좋음. 베너타의 책을 번역한 이한 변호사는 이에 대해 어떤 도덕 이론을 선택하는 데에는 반드시 실익(구체적인 도덕판단의 차이?)이 뒤따른다고 했음.
예를 들어 공리주의를 선택하면서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고통에 가중치를 둔다던가 고통과 쾌락의 등급을 나누어 다수의 낮은 쾌락보다 소수의 높은 고통이 중요하다고 땜질하는 식으로 논리를 구축하다보면, 이게 과연 자유주의를 선택했을 때와 어떤 도덕판단의 차이가 있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어질 수 밖에 없음.
그만큼 직관공리 아래서 정교한 논리 구조를 짰다는 뜻. 그래서 반대자들은 대부분 직관공리를 공격하는데, 공리주의자 외에는 모조리 재반박당하고 있음. 공리주의는 결론적으로 더 많은 쾌락의 생성을 위해 태어날 존재를 희생시켜도 되기 때문에 평행선을 그림.
단순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어남으로 얻는 고통이 얻는 행복보다 확실하고 더 클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 산도를 비집고 나오는 순간부터 고통이며, 욕구는 충족시키면 더 상위 욕구 충족을 원하게 되고, 그러다가 일말의 행복도 죽음으로 인해 박탈당함. 사고사든 자연사(노화의 고통)든 고통은 상대적으로 확실. 행복은 확실치 않음.
그리고 설령 뇌가 고장나서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있다 가정하더라도, 그게 네 자식이라는 보장은 없음. 그렇다면 네 인생도 아니고 자식이라는 남의 인생으로 도박을 해선 안 됨. 리스크 방지는 의무. 그 반대는 의무 아님.
나한테는 태어남으로 얻는 고통이 확실하고 욕구 충족의 문제 때문에 생은 고통의 만연으로 귀결된다는게, 상당히 전제를 강요하는 말처럼 들리지.
전제는 직관이고, 네가 그 직관을 부정하려면 사례를 들어야 함. 직관 중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직관들이 더 강력한 윤리공리가 되는 것임. 비록 그것들을 출산에 적용했을 때 반직관적 결론이 나오지만, 논리 전개에 하자가 없다먼 그것이 옳은 것임.
내 말은 그저 명확한 평가가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서 전제를 내려놓고 간다는게 독선적으로 들렸다는 얘기임. 삶이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난 직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죽음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너는 사고나 질병으로 일찍 죽거나 늙어 죽어야 함. 너는 노화의 고통을 직시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임. 그리고 부모는 자신이 늙어 죽어보기도 전에, 그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지도 않고 아이를 낳음.
잠시간의 쾌락도 결국은 적응과ㅠ역치로 인해 무료함 따분함이라는 고통이 되는데 어째서 삶이 고통이 아닌지 설멸해보기 바람.
노화에 대해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삶의 행복과 만족은 잠깐의 쾌락이나 역치로 인해서 그 가치가 퇴색되는 기초적 욕구 충족에만 있지 않다고 보니까.
그런 식으로 모조리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가능성으로 접근한다면, 모든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지 못함. 따라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죽음이라는 심대한 리스크 방지 의무가 우선됨.
그리고 결국 베너타의 말대로면 동물에게도 이 논리는 적용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모든 새로운 생의 부재가 답이라는 건지도 궁금.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문제를 인식할 주체를 없앰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꼴이 아닌가?
네 인생으로 도박을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음. 문제는 자식이라는 남의 인생으로 도박을 한다는 것임. 고통도 의미가 있다, 죽음도 가치롭다라며 자식에게 강요를 하는 셈임.
당연히 의식 있는 동물에게도 적용이 됨. 인간에 의존하고 있는 동물, 가축 같은 경우 번식을 막는 것이 더 옳을 것임.
... 베너타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확실한 삶'이라는 것도 강요처럼 들리는데.
원인을 없애면 문제도 없는 건 당연한 이치. 무엇이 잘못됐다는 건지? 비출산이 죄가 아니라면, 하등 문제가 없음.
태어나지 않으면 강요받아 고통을 느낄 존재 자체가 발생하지 않음.
설마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가 어디 비물질계 속에서 영혼 상태로 자신을 낳아달라고 요구하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무언가 강요하지 않기 위해 낳아야 한다면 평생 쉬지 않고 임신기계로 살아야 하며 인공수정공장을 돌려야 함.
모든 자의식 있는 존재의 부재가 가장 이상적인 건 맞음. 단지 그 결과만을 위해 자살하고 학살하려 들면 소극적 공리주의가 되어 버림. 착각하면 안 될 게 쾌락과 고통을 언급한다고 다 공리주의는 아님.
내 감상은 베너타의 논리는 단순히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반해서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있겠지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가치론의 영역에서 한쪽으로 권위를 부여한 전제를 바탕으로한 논리인데. 그런부분에서 그냥 반감이 들었다는 거임. 내 생각이랑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그 존재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 전제부터 안 맞다는거지. 그렇다고 출산을 권장할 필요도 없고 그냥 삶에 대한 가치판단은 아직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때문에 획일적으로 어떤 전제를 강요할 수 없다고 보아서. 결국 나랑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예 가치판단의 관점이 달라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공리주의가 아니면 대단히 반박하기 어려움. 억지로 내가 보기엔 아닌데?를 반복할 순 있지만, 동원되는 직관공리의 질과 양에서 밀리는 것임. 가치론적인 논쟁은 결국 직관 싸움임.
난 삶의 가치론에 있어서는 회의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에 애초 그런 의문이 생겼던것 같다. 직관 싸움이 맞네 답해줘서 고마웡
전제 자체를 반대한다면, 그 직관들이 반영된 사례를 일일이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보이고, 왜 자신이 제시하는 직관들이 더 통용되며 더 간단하게 설명가능한지를 해명해야 함. 단순히 아드혹을 반복해서 아닐 수도 있다는 논리적 물타기만 반복한다면, 논리가 지저분해질 뿐이고, 설득력이 떨어지게 됨.
아드혹이라기엔... 난 과학적 회의주의에서 직관을 평가하고 싶다는 걸 분명히 해두겠음. 삶의 고통에 대해서 애초에 베너타가 말한 '직관'도 사실은 검증되지 않은 일부 사례의 집합(특히나 인구과잉으로 인한 문제점들은 더)이라는게 내 입장임.
난 인간의 생에 있어서 고통의 순간과 행복의 순간의 길이, 정도 차이 그 의미, 욕구의 역치, 죽음의 도래가 갖는 인간 인생에 있어서 고통정도... 이런건 아직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보기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않나? 라고 생각한거
사실 계약론적으로 우리가 타인의 모든 고통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꼭 자식의 고통을 원천 차단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순 있음. 문제는 태어나기 전 존재는 아직 계약론 밖에 있는 존재고, 설령 억지로 집어넣더라도 심각한 고려가 필요한 수준의 고통, 죽음이 예정된다는 것임.
회의주의나 도덕적 허무주의, 도덕적 상대주의는 자승자박이 되는 경향이 있음. 네 일련의 모든 생각과 주장 그 자체에는 회의주의가 적용되지 않을까? 도덕을 포기한다면 대화 자격부터 잃을 것임.
그래서 결과적으로 절대주의에게 끌려다니게 되는 것임. 어차피 자기 생각조차 절대적인 게 정말 없다면, 절대주의로 가더라도 상관이 없기 때문.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예외 없는 법칙 없다"는 그 자체로 역설에 빠짐.
흠....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거나 판단 기준이 불명확한 직관에 대해서 특정 직관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유보의 입장이 낫다고 생각할 뿐이지. 인간의 삶의 고통과 행복을 이루는 요소들이 워낙 복잡하고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모호하기에 적합한 판단기준을 세울 때까지 기다리는거지.
그것도 결국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생김. 본인 생각이 확고하지 않다면 그토록 반복해서 주장할 이유가 없지 않겠음?
낳는 게 옳은지 불확실하니 낳는 것을 유보하는 거라고 바꿔 말하면 어떰? 자식 인생의, 생명의 중요성을 생각해 수십 년을 유보하며 고뇌하는 것임. 그러다가 폐경이 오거나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미 고아가 넘쳐나는 80억지구서 출산보다 입양이 더 도덕적이라는 직관에 동의하지 않음?
과학적 회의주의는 좋은데.. 이러는 게 낫다는 주장은 가치를 부여한 주관적 주장 아닌가..?
심리적 편향은 부정적인 면에도 적용되지 않나? > 부정적인 사람은 존재하지만, 정신건강과 생존의 문제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부정적이기는 어려움. 또한 태어날 자식의 인생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면, 리스크를 방지하는 게 우선임.
부정성 편향은 정보 습득으로 생겨남. 그 전에는 긍정성 편향(인간 8할이 가지는 낙천 편향과 다름)이 우선됨. 전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단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됨. 그 후에 단점이나 나쁜 소문이 들리면 그것이 기억에 강조되는 것이 부정성 편향. 세상이 충분히 나쁘기에 정보량이 증가할 수록, 지식을 갖출 수록 시니컬해지는 것일 수 있음.
이분 배너타 본인인가 ㄷㄷ 뭐 전공하심? 논리가 매우 치밀하시네
결론이 문제를 해결하자는건지,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을 없애자는 건지 모호하게 들렸다. > 개인이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 결과에 집착하는 건 공리주의. 물론 결과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뜻은 아님. 그러나 멸종이라는 결과가 당장 개개인의 비출산 실천보다 더 중요하진 않음.
태어날 사람의 이익이 우리가 평가할 수 없는거라면, 태어날 사람의 고통 역시도 우리가 평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 태어나지 않으면 고통 가능성은 0이 됨. 오직 태어날 때만 고통 가능성이 열리고, 죽음을 겪게 되는 것임. 왜 리스크를 구태여 감수하는지? 그건 현 세대의 이기적 욕구 때문이지 태어날 미래 세대를 위함이 아님.
베너타의 논리는 쾌고를 감각하는 생명체를 최초로 만들때나 유효하다고 생각함. 님이 이 댓글을 볼진 모르겠지만. 내 요지는 도박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지만 이미 도박을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다는거임. 생식도 그와 유사하다고 보임. 나도 생식윤리에 관해 수많은 반성을 했지만, 냉정하게 따져서 존재케 된 것에 대해 생물학적 의미에서
부모에게 아주 깔끔한 방식으로 어떤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는게 내 의견이다.
공리주의적 가치론을 따르면서 공리주의와 극도로 거리감을 두는 것도 이상하고 > 공리주의가 아니라 의무주의 기반임. 희생을 감수하는 쾌락의 최대화가 아닌,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고통 방지 의무를 우선시하는 것뿐임.
과학은 가치판단을 하지 않음. 주관이 모여 객관이 되며 주관끼리도 동의받는 정도에 따라 차등이 생김. 과학 역시 귀납에 의존하므로 연역적 결함이 있음. 분석철학 논문이 일견 단언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함. 만사만물의 불확실성을 문장마다 부연하는 건 편집증적. 수십 년간 사유를 다듬는 학자들이 누구나 간단히 떠올릴 만한 반박을 고려하지 않을 리 없다는 거.
고통은 주관적이지.. 그러니까 더 문제 아닌가..? 암만 99가 별 거 아니라해도 1은 주관적으로 엄청 괴로울 건데.. 확률적으로 누군가는 살자하게 되는 상황을 강요하는 게 잘하는 짓은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노인네들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죽기 싫어서 발버둥치다가 어거지로 죽을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