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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썼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처음 읽은 건 교양 수업에서였다. 이청준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이제와선 잘 모르겠지만 중간, 기말 레포트를 몽땅 이청준으로 채웠었지. 이어도,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와 벌레 이야기로. 종종 그 때 기억이 난다. 이른 새벽까지 스탠드 아래서 이청준을 읽던 일이나 종일 노트북을 붙잡고선 썼다 지웠다 하던 일 따위가.
인간이 관계를 맺는 이상 폭력을 피할 순 없다.
기말 레포트엔 그런 문장을 적었다. 우린 우리 곁에 “바이러스처럼 규정하기 어렵고 통제하기 힘든 존재자”가 산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실은 “폭력과 희생을 수반하는 위태로운 공번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을 뒤에 붙였다. 그 뒤로 그 문장은 앙금처럼 남아 오래도록 녹지 않았다.
밀양을 보고나서 돌연 그 문장이 떠오른 건 영화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했기 때문일까. 이창동의 내러티브가 이청준의 그것을 닮은 탓이었을까. 아니, 두 작품 사이엔 명백한 간격이 놓여있다. 벌레 이야기가 발표된 건 1985년이었다. 밀양은 2007년 작품이다. 두 작품 사이엔 22년의 시간이, 그러나 그 기간보다도 큰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 단순히 영화와 텍스트라는 매체의 변화 이상으로 큰 차이가.
1.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
20쪽 가량의 단편 소설과 2시간 반이 넘는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이야기의 밀도다. 초당 24프레임으로 압축된 이미지는 소설의 두께를 아득히 넘는다. 뒤집어 말하자면 벌레 이야기가 밀양으로 탈바꿈하려면 빈 곳을 무언가로 메워줘야만 한다. 그 차이는 공간에서 드러난다.
벌레 이야기의 공간은 거진 생략된 채다. 그 밖의 주변적 요소, 이를테면 배경과 인물간 관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밀양이라는 도시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이름이 등장하는 캐릭터는 죽은 아이(알암이)가 유일하다. 텍스트는 아이가 살해됐다는 중심 사건과 사건에 휘말린 알암이 엄마의 심리에만 주목한다. 심지어 작품의 핵심인 알암이 엄마의 심리마저 관찰자 시점에서 묘사하여 의도적인 공백을 만든다. 이 공백이 독자로 하여금 '용서'라는 다소 관념적인 주제의식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가 진정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가? 신이란 무엇이고, 용서란 무엇인가?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이청준은 오롯이 침묵으로 대응한다. 이청준 답다면 이청준 다운 문법이라고 할까.
그러나 밀양은 다르다. 밀양,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밀양이라는 공간에 상당한 비중을 두려 한다. 이 공간이란 단순히 장소로써의 공간이 아니다. 작품 초반 신애는 이런 질문을 한다.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
뭐라캐야 되노. 종찬은 답한다. 그는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다. 부산에 가까운 도시, 한나라당 도시, 경기가 엉망인 도시, 그는 그런 말로 밀양을 소개하지만 그건 신애가 원하는 답변과는 다르다. 이어서 신애는 밀양이란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비밀의 햇볕. 그 말에 정작 밀양 시민인 종찬이 감탄을 한다. 밀양은 대체 어떤 곳인가. 작품 말미 신애의 동생 민기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예.
이 대사에서 집중해야하는 부분은 똑같다, 가 아니다. 사람 사는 데. 온갖 종류의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 밀양의 핵심은 사람에 있다. 밀양이란 도시의 특성은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 내지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초반 35분을 밀양 시민 이야기로 채운다. 밀양의 풍경, 밀양의 건물, 밀양 가게의 인테리어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 대신 신애와 마을 사람간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 때 대화의 내용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도시가 어떻고 땅이 어떤지, 생활이 어떻고 사람이 어떤지에 대한 일상적인 대화. 그러나 어떤 대화든 사이엔 묘한 긴장이 흐른다. 서로를 어색해하는 것도 같고, 불편해하는 것도 또 평가하는 것도 같은 긴장. 영화는 이렇듯 사람의 관계에 천착한다.
김집사와 신애의 첫 만남.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2. 잘 보이냐구
공간으로 구체화된 인간들은 카메라워크와 배우의 시선처리를 통해 관계성을 획득한다. 시선은 이창동 작품 세계의 중요한 모티프다. 그의 작품에서 시선은 때론 욕망을 드러내기도, 또 한편으론 사람 사이의 알력을 드러내기도 한다.
밀양의 독특한 지점은, 인물들이 좀처럼 마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종 사람이 병치된 구도를 보여준다. 마주봐야할 경우엔 한 명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둘 이상이 한 장면 안에서 마주보는 경우는 잘 없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여자라며 뒷담화 하는 장면. 거울 뒤에 사람이 모인 것 같아 마치 신애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종찬의 지인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 신애가 몇 번 실수를 하자 뒤에 묘한 정적이 흐른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꼭 신애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 같다.
이런 구도는 타인을 몰래 평가하는 시선을 포착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말한 건 사르트르였다.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를 물건처럼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런 시선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시청자가 인물들의 시선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이창동의 시선은 사르트르의 '타자화' 개념과는 다르다. 타자화는 면역학적인 도식이다. 아군과 적군, 이웃과 이방인, 사람과 물건으로 딱 선을 긋는 행위다. 밀양에서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서울에서 왔음을 알아도 무심히 받아들여주는, 아니 받아들여줘야만 하는 관계에 가깝다.
방금까지 뒷담화를 한 사람과 자연히 함께 식사하는 모습.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밀양의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다가온다. 남편을 잃은 신애에게, 불행을 이겨내야한다고 말하는 약사. 피아노 학원 손님을 대신 찾아주는 종찬.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려 다가가는 스스럼 없는 시민. 왜 그래요 하는 질문에 이웃이니까요, 하고 종찬은 말한다. 이웃. 이방인이 아닌 이웃. 이웃이기에 당연히 서로 의무를 지는 관계. 이처럼 밀양에서의 관계란 개인간의 관계라기보단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이다.
과잉 친절은 때로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신애가 다른 가게 인테리어를 유심히 살펴보고 함부로 평가한 게 사장에게 상처로 남았듯이, 의도완 상관 없이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자체가 불쾌함을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그런 친절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웃이란 본디 멋대로 뗄 수 없는 관계니까.
종찬이 거울을 들어주는 장면.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던 신애가 거울을 종찬에게 맡긴 게 의미심장하다.
한편 작품 속 기독교 신자의 눈은 또 다르다. 작품 중 신애는 분노를 못 이기고 설교 중 가요를 크게 튼다. 그러나 설교는 멈추긴 커녕 더 진중해진다. 노래가 흐르는 순간 신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는다. 문자 그대로의 맹목. 신자의 기도는 결코 누군가를 위하지 못한다.
눈 감고 기도하는 신도.
주체/타자/대상화 따위 고루한 단어는 이창동이 그리는 관계에 맞지 않다. 그런 단어는 너무도 쉽게 나와 타인 사이에 경계선을 지어버린다. 들척지근하게 한 데 뒤섞여 분리할 수 없는 관계, 아무리 떼고 싶어도 뗄 수 없이 붙어버린 이웃 사촌같은 관계, 그러나 서로의 고통은 끝까지 알지 못한 채 피차 상처만 주고마는 그런 관계. 인물들의 시선에서 드러나는 영화 속 인간 관계가 그러하다.
3. 어째서 종찬인가?
종찬은 밀양이 그리는 그런 '이웃 사촌'의 전형이다. 그는 바라지 않는 친절을 내세워 신애와 어떻게든 한 번 엮여보려는 생각 뿐이다. 아들을 잃은 신애의 슬픔을 그는 알지 못한다. 신애는 그런 종찬을 모질게 밀어낸다. 피차 상처만 주는 관계.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까지 둘은 붙어있다.
벌레 이야기엔 종찬이란 캐릭터는 없다. 대신 남편이 있다. 남편은 한 발짝 떨어져 아내를 관찰하는 인물로 작중에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들을 유괴당한 후 남편 자신이 느낀 감정,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느낀 감정, 자꾸 지분거리는 김집사에게 느낀 감정은 따로 묘사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남편의 위치는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이다. 이 거리감 덕에 독자는 아이를 잃은 상황 자체엔 과히 몰입하지 않을 수 있고, 대체 용서가 무엇인지, 용서 속에 어떻게 폭력이 담길 수 있는지를 차분히 고찰해보게 된다.
종찬은 서술자가 아니라 또 하나의 배역이다. 종찬의 시선엔 기분나쁜 욕망이 숨어있다. 그는 쉽사리 성희롱을 하고 농담을 던진다. 신애가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는 순간에도 그는 신애와 밥 한 끼 먹을 생각에 신나한다. 비극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란 점은 벌레 이야기의 남편과 똑같지만, 그 '시선'의 차이, 관계의 차이는 크다.
종찬과 신애가 처음 교회에 온 모습. 신애는 이후 신도가 된다. 종찬의 시선과 신애의 감은 눈, 둘 사이의 온도차가 대비를 이룬다.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벌레 이야기 중)
비슷한 듯 다른 대사. 벌레 이야기에서 이 말은 멋대로 용서를 한 신에게 향한다. 그러나 밀양에서는 신이 아닌 신도들에게 향한다. 멋대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신도들에게로. 신이 아닌 공동체로. 그렇기에 벌레 이야기는 철저히 신에 대한 부정 - 자살로 결말을 맺는 반면, 밀양은 자신의 고통에 무감한 이웃에 대한 보복(간통, 설교의 방해 등)과 인정(혹은 체념)으로 끝을 낸다.
이렇듯 이청준이 적절한 생략과 메타포를 통해 주제의식을 강화하려한다면, 이창동은 과감히 은유를 포기한다. 구체적인 사건, 인물로 시간을 빼곡히 채워넣는다. 그 실재적인 이미지 속에서 우린 주체와 타자로 이분되지 않는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망을 보게 된다.
어느샌가부터 이창동의 영화에 대상화, 타자화를 붙이는 사람이 늘었다. 이창동에게 무감각한 남성 감독이라는 평을 붙이는 이들도. 그러나 이창동이 그리는 인간관계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폭력과 희생을 수반하는 위태로운 공번성”. 이 관계에 대한 감수성이 이청준과 대별되는 이창동만의 세계가 아닐는지 생각해볼 따름이다.
작품의 마지막 씬. 언제나 상처로 남을지라도 최대한 서로를 보듬어가며 살아가야한다는 메세지로 읽고 싶다.
밀양 좋은 영화지... 근데 3번 "어째서 종찬인가?" 2번째 문단 "그 결과로"로 끝나는 부분 먼가 짤린 것 같워요
ㄱㅅㄱㅅ 수정했슴다
좋은글 잘읽었슴다 근데 공번성이 뭔가요? 공변성의 오타인가요? - dc App
함께 번성한다는 의미에서 공번성입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 dc App
이청준 읽어야지 한 게 옛날인데 여태 안 읽어봄. 이창동은 참 좋은 감독이지. 영화적이지 않고 문학적이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던데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나로선 딱히 납득은 안 되는 듯. 아무튼 난 버닝이 제일 좋더라. 아직 시는 안 봤지만
문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영화당에서 이동진이 얘기한거 있는데 오해라고 - dc App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창동 감독님... 감독님이 85년에 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내셨는데 밀양을 찍으면서 어떤 감정이셨을지. 밀양을 보면 그 모든 질곡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인간을 향한 감독님의 사랑이 느껴져서 참 좋다.
밀양은 진짜... 내가 죽을 때까지 이것보다 훌륭한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음.
좋은 평론 잘 읽었습니다.
밀양.. 개인적으로 한국영화 올 타임 넘버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