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1. 욥기의 원형은 사해 분지/협곡 쪽 이교도 부족에서 정의Justice에 대한 다짐을 강화하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서두의 불의injustice한 것처럼 보이는 조치 때문에 도전받지만 마침내 피해를 다 복구하고 그의 인내심에 두 배로

보상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즉, 삶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을 먼저 시험받고, 이어서 굳건한 믿음 덕에 보상받는다.


2.어느 히브리인이 욥기를 수정해서 다시 썼는데, 그 이유는 바빌론 유수 때문이었다.

정의만으로는 바빌론 유수 이전의 삶을 되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정의만 생각했다면, 공정한 예루살렘 주민들은 억울하게 죽은 히브리 영아의 수반큼 바빌론의 아이를 살해했을 것이다) 침략으로 훼손된 비폭력적 삶을 되찾으려면 정의말고 다른 것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였다.


3.사해 쪽 욥기 원형의 산문 대신 히브리에서 추가한 새로운 구절로 길이는 스무 배 이상 늘어났고 운문체 서사시가 되었다.

추가된 부분은 욥이 시험을 받을 때 참지만 않고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나이까?"라고 따진다.

대답이 없자 욥은 좌절하여 불평을 늘어놓는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욥이 이렇게 도전하는 것은 엄격한 공정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뇌는 욥이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느낀다.

이런 느낌은 하나님이 욥에게 돌연 화를 내는 순간 확신으로 바뀐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 네가 갈고리로 리바이어던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이러한 질책은 우리 뇌에서 '그래, 욥이 잘못했어. 그러니까 욥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해. 정의를 이뤄야 하니까."라고 메아리친다. (??????????)

그런데 우리 마음이 욥에게 반대하기로 마음을 굳히는 바로 그 순간, 시인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추가한다.

"내가 스스로 질책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말은 욥의 입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 뇌가 이미 내린 결론, 즉 욥은 티끌과 잿더미 속에서 끝나도 싼 죄인임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욥의 이 말은 정의를 추구하는 뇌의 욕망을 용서의 기운으로 누그러뜨린다. 현대 신경과학자들은 그 기운을 공감이라고 부른다. (?????????????????)


4.이하 우리 뇌가 강하게 정의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갈망하게 타고 났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답변 및 설명. (대충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속이면 합심하여 그 사기꾼을 처벌하지 않으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강자 뿐이고 약자는 보호비를 지불하고 강자에게 합류해야하고 점차 파벌끼리 분쟁이 나서 전쟁터가 되지만, 사기꾼을 처벌하는 행위는 마을을 하나로 묶고 공동체 안에 신뢰가 쌓이고 결속력이 강화된다는 내용, 즉 정의가 공동체의 장기적 안정과 다양성에 좋다)


5.근데 그런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장기적 선에 도달하기 전에 단기적으로 개인에게는 언제나 도움이 되는건 아님.

이웃을 위해 공정성을 추구하다가 다치거나 죽으면 개인의 입장에선 전혀 이익이 아님.

게다가 누군가 잘못했다는 확신으로 뇌가 지나치게 흥분해서 이례적으로 잔인한 처벌을 가하거나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사회적 문제"와

삶의 불공정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분오와 억울한 감정에 휩싸여 고립된채 증오심만 쌓게 되는 "개인적 문제"가 발생함.

따라서 우리 뇌는 자기보존에 대한 단기적 충동을 "적절히" 억제하고 정의를 "적절하게" 추구하게 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그 수단이자 균형추가 바로 "공감"(관점 수용 네트워크)이다.


6.공감은 가해자 입장에서 잘못을 상상한 다음, 정상 참작 요인을 찾는다. 그러면 거의 언제나 그런 요인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용서를 통해, 완전한 정의 구현에 따른 가혹한 사회적 문제를 방지하고 개인적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즉 공감은 우리의 본성을 유지하면서 가해자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근데 공감은 우리의 타고난 자기중심성 때문에 왜곡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조들이 개발한 것이 바로 "사과"이다. (Apology)


7.사과는 잘못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현하는 행위다. "그렇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 간단한 단어 공식이 우리의 공감(관점 수용 네트워크)의 복잡한 하위 영역을 자극해서 가해자의 관점에서 잘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가해자가 애초에 그런 고통을 일으킬 의도가 없었다고 느낀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맹세에 우리는 너그럽게 용서한다.


8. 사과가 항상 효과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가해자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 우리 되는 눈치가 빠르다. 따라서 우리 뇌는 공감 회로와 상담하고 나서야 사과를 받아들인다.

사과는 최대한의 확실한 정의와 최대한의 가능한 용서로 사회를 돌보게 하여

머리로는 공정하게, 마음으로는 너그럽게 살아가게 한다.

우리 뇌가 사과를 받아들이면 분노와 피해의식 같은 부정적 감정은 줄어드는 반면

신뢰와 사랑 같은 긍정적 감정은 늘어난다. 즉, 정신 건강이 전반적으로 개선되는 것이다.


9. 욥이 하나님에게 "내가 스스로 질책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사과할 때도 그렇다. (??????????)

욥의 말이 우리 뇌에서 이러한 효과를 발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개개인의 뇌가 다르기에, 우리 중 일부는 욥의 사과가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

하지만 고대 히브리 우화의 맥락에서, 그 사과는 확실히 효과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욥을 용서하고 욥이 잃었던 재산을 다 돌려준다.

욥이 행복해진 건 결국 하나님이 공정할 뿐만 아니라 공감하는 측면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11페이지 대충 요약한건데

매우 ???????????????? 스러운데 나는.

일단 내가 읽으면서 느낀 점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을(욥)이 꼰대갑(사막잡신)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음.

욥이 가해자이고 욥이 신성모독했다고 사막잡신이 화내는거에 아 욥이 잘못했네~ 욥이 사과해야겟네~라고 공감하는 걸 전제로 설명하니 중간중간 이뭔개소리야 싶었음.


기독교 특유의 원죄 의식과도 연관이 있나 싶기도 하고.

니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죄를 안고 태어난 것이니 신에게 사과를 해라 라는 소리인가?

난 원죄 의식을 (본인 의지와는 관계 없지만) 태어난 이상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기 합리화 정도로 여겨서 딱히 사막잡신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함.


각박한 세상에서 잘못한 것 없어도 아무튼 굽히고 들어가고 사과해야 할 일이 왕왕 있는데 그게 신이 할 짓이냐?고 생각되서 더 반감이 생기는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