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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시몬 드 보부아르 저/문예출판사
옛날에 한 번 써봤던 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시대의 풍운아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던 철학 사상인 실존주의의 사상가 중 한 명이자, 프랑스의 독일 강점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문학가로서 활동하였으며 다른 문학가들과 교류를 쌓았다. 무엇보다 사르트르와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대사건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관습적으로 전유 되던 구습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낼 수 있었으며, 철학과 문학적 지성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보부아르의 저작들은 모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았다.(사르트르도 보부아르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실존주의를 기반으로 여성의 권리와 페미니즘 사상을 확장시켜나갔고, 가부장제를 넘어서 남녀의 온전한 자유와 평등, 여성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마땅히 가져야 함을 역설했다. 그녀는 남녀가 평등한 애정관계에서 비롯된 가정을 이룰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남자의 어떠한 권위적 권력 남용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으로서, 평등한 관계에 놓인 그들은 인습적인 가정 관계를 청산해야만 하는 것이다.
위기의 여자는 보부아르가 60세가 되었을 때 쓴 장편소설이다. 그녀는 이전에 '제2의 성'을 저작하였고, 그녀의 남녀평등사상을 집대성한 책인 만큼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무조건적으로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위기의 여자'는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통해서 가부장제의 폐해를 함축해낸 저작이다. 이 서평을 읽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 책이 20세기 중반에 쓰인 책이며 책의 의미를 현대의 세계관에 맹목적으로 적용하긴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주인공은 가부장제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되면 주부이자 아내의 역할로 한정되어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여성이다. 현대에선 가부장제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분명 개인의 자유가 1960년대 프랑스보다 더 많이 보장되어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현대에서 이 책의 의미를 일반화시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가부장제의 모순과 폐해를 폭넓게 이해하여 색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위기의 여자는 아내이자 두 딸의 어머니이자 여성인 모니크가 남편의 불륜에 의해 타자로 놓임으로써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과 위기, 갈등과 극복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모니크의 남편인 모리스는 노엘리라는 내연녀와 교류하게 되고, 그냥 참고 그를 용서하면 저절로 관계가 회복된다는 친구의 조언으로 모니크는 모리스의 불륜을 방치하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된다. 그녀는 남편과 내연녀의 연애 속에서 소외되는 자신의 상황 속에서 처절한 고통과 자신의 존재와 자아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며, 자아를 찾기 위한 처절하면서도 솔직한 고뇌의 몸부림을 펼치면서 방황한다.
소설 서막에서 나오는 모니크의 담담하면서도 침착한 서술과 후반에 나오는 그녀의 처절하고 지친 서술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초췌하게 된 계기는 남편의 불륜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정신적 고통과 방황의 근원적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보부아르는 모니크가 처했던 가부장제 가정이 그녀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음을 묘사한다. 모니크의 일상과 행동거지는 가부장제의 요구에 부응한 이상적 여성상에 부합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행복을 보장하기엔 너무나도 불안정하였고, 남편의 불륜에 정신적 한계를 느끼며 맥없이 무너진다. 왜냐하면 그녀의 가치관에선 그녀에게 전부는 남편이며 그녀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는 모두 남편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만든 음식, 그녀가 빤 빨래, 그녀가 하는 취미 생활, 그녀가 깨끗하게 하는 청소는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고, 그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그는 금방 싫증을 내기 일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내로서의 역할과 가치는 단지 남편에 의지하고 부차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남편에게 헌신과 봉사를 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명백한 남편의 배신행위였다. 심지어는 남편의 불륜은 노엘리와의 불륜뿐만 아니라, 무려 10년 동안이나 상대가 달라지곤 했던 오래된 관습이었던 것이다. 모니크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밥도 먹지 못할 정도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음은 새삼 놀랍지도 않는다.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사랑했던, 남편과의 오래된 추억까지도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그녀에겐 지금까지의 세월과 헌신이 무의미한 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모니크에게 닥친 이 시련에서 그녀가 어떻게 상황을 헤쳐나가며, 그 이면에는 어떠한 가부장적 관습이 존재하는지, 또한 그것이 어떻게 여성의 자유를 박탈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를 관대하게 자유로이 원하는 대로 불륜을 묵과하지만, 점차 내연녀에게 뒤처지는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을 자책한다. 그러나 생각해볼 점은 왜 불륜이 일어나고 그녀가 고통받아야 하냐는 점이다. 보부아르는 이 이유를 제2의 성에서 밝힌 바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권태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이 결혼하고 남성은 흔히 여성을 가정 속에 가둬놓고 자아의 실현을 하는 반면, 가정에서 고정된 이미지를 요구받는 여성은 역동보단 안정을, 행동보단 조신을 도덕률로 삼게 된다. 삶에 반응하는 태도가 여성에게 요구되면서 여성의 변화와 발전은 정체된다. 이 시점에서 여성은 인간 본연의 특성인 역동성과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객체로 내던져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이 정체된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잃기 십상이다. 항상 보던 얼굴, 항상 듣던 말, 항상 내비치는 태도 등은 남편이 보기엔 너무나도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삶의 지루함을 느낀다. 가정에 속박된 여성은 권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항상 역동성과 창조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게 인간의 삶이다. 권태로운 삶은 남편에게 색다르고 신선한 경험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모니크가 모리스에게 버려진 이유다.
모니크는 너무 과거의 불변성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10년 전에 느꼈던 남편과의 뜨거운 키스와 애정과 사랑을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의 진리이자 사랑으로 믿었고 남편 또한 사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자 거짓에 불과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말았다. 인간의 사랑이 영원불변하며 그 자체로 위대한 가치를 지닌다는 낭만적인 진리는 틀린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상대의 신선함에서 출발한다. 안타깝게도 모니크의 과거는 이미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니크에겐 가정에서 벗어날 기회와 능력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정에 봉사한 시간이 너무 오래고, 자신은 늙었으므로 어떠한 창조적 노동을 하기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선 무엇보다 젊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두 딸을 다 키워낸 어머니에겐 능력조차 없다. 그렇게 탈출구조차 시간이 부족하여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습게도, 모리스는 그가 불륜한 이유를 고정적이고 항상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된 모리스에게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리스가 가정에서 나가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굉장히 모순된 마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모니크의 영원한 추억이 깨지고 그녀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 모든 가치와 진리는 가부장제에서 만들어진 허상임을 알아야 한다. 평화로운 가정. 내조를 하는 여자와 거기에 부응하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사랑을 향유하는 부부라는 신화는 침전된 구습에 불과한 것이다. 이 구습은 여성에게 강제적인 도덕률로써 작용하였다.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나서지 말아야 하며 남편과 아내는 서로 영원히 사랑하는 등의 이러한 고정관념은 여성의 눈을 가리고 비현실적인 세계관에서 사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 현실에선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니크의 고통이 단순히 불륜 때문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의 깊이 면에서 자아와 존재의 소실은 그녀의 삶의 일대기에서 이전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자신의 존재를 성찰해야만 하는 당위를 가져야만 했다.
모니크가 어떻게 성찰하였고 어떤 결말을 맞이했음은 소설의 내용을 발설하는 것임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녀가 인간 본연으로써의 삶을 성찰하고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보부아르가 바랐던 양성평등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양성평등의 정의를 이렇게 하고 싶다. '여성과 남성이 어떠한 차별과 성적 고정관념을 갖지 않으며, 인간으로서의 자유가 성별로 구분되어 한쪽으로 편중된 불평등한 자유 실현이 이뤄지지 않으며, 능력과 기회가 양성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되며,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 우리는 이것을 위해 싸워야 할 뿐이다. 여성의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까지 같이 고려하며, 성별이 보편적인 평가의 고려 대상이 되면 안 되고, 그 누구도 생리적 차이 때문에 차별이나 불편을 받아선 안된다. 이것을 조정할 주체는 국가여야만 한다. 국가는 여성과 남성이 차별이나 불편함 등을 받지 않도록 실질적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가장 기초적인 교육이 이뤄지는 가정에서 원초적인 시발점을 갖는다. 이에 대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무릇 아버지들이란 결코 자신이 바라는 딸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은 그들 나름대로 딸에 대한 어떤 영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 영상대로 딸들이 의무적으로 순응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있는 그대로의 딸들을 받아들인다. 콜레트는 무엇보다도 안정된 생활을, 그리고 뤼시엔은 자유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나는 두 딸을 다 이해한다. 그들에게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이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콜레트, 그리고 정력적이며 재기 발랄한 뤼시엔- 나는 그 애들이 모두 훌륭하게 제 갈 길을 찾아갔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우수한 대학 학력을 가졌음에도 안정된 생활을 위해 취업과 직업진로 대신 결혼을 함으로써 가정을 꾸린 콜레트와 자유롭고 진취적인 미국으로 떠나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뤼시엔을 모두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어머니 모나크의 심정이다. 즉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식들에게 고정된 관념이나 진로를 심어줄 것이 아니라, 자식들의 본성과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육아와 양성평등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자와 여자에게 완전한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리적으로 성별 간에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위치해있다. 그 본성에 따라 생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다양한 성격과 성질이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다양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양성평등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어야 우리는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여자는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책이지만 단순히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제로 이해하기엔 보부아르의 정신을 곡해하기 쉽다. 우리는 남녀의 진영 논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성찰해야만 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자유, 평등, 기회, 도덕 등에 관하여 인간이 차별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만 이해하면 된다. 그 이후엔 그냥 존재로서의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 걸 지켜보면 될 뿐이다. 중요한 건 인간이지, 다른 잡다한 구분이 아니다. 남녀마저도 유치한 편가르기를 하며 싸우는데, 더 가치 있는 일은 어떻게 도모할 수 있을까? 반목보단 화합, 구분보단 통합, 족쇄보단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가 미래를 정의롭고 옳게 만드는 사회가 될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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