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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누가 이것을 소박한 꿈이라고 조롱할 수 있으랴.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건 원대한 꿈이다.

그러나 나는 재수 없게도 공무원이 되지도 못 했을 뿐더러, '행복한 저자' 역을 맡지도 못했다. 시인, 소설가라는 꿈에도 원치 않았던 개똥 같은 광대짓과 함께 또 한 권의 책을 출간하고자 머리말을 짜내고 있는 나는 '불행한 저자'이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내가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읽는 모든 책의 양부가 되고 의사(pseudo) 저자가 된다.

막연하나마 어린시절부터 지극한 마음으로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선해서 골라 든 책을 안고 침대에 푹 파묻혀, 밑줄을 긋거나 느낌표 또는 물음표를 치면서 나 아닌 타자의 동일성에 간섭하고 침잠하는 일.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뒷장에 내 나름의 '저자 후기'를 주서하는 일. 나는 그런 '행복한 저자'가 되고 싶다.

오늘날 누가 얼굴을 똑바로 하고 자기 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단어가 가진 가장 엄밀한 의미를 좇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서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