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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그 창조주를 보고 붉혔도다>

http://soollife.com/?p=4829



필자는 재야의 여고생 "제임스초이스"이다.



위 일화는 필자가 어린 시절에 어느 힐링 도서에서 읽은 바 있는데,



거기에서는 "물이 그 주인을 뵙자 얼굴이 붉어졌도다"라는 구절로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 일화는 시의 본질을 간단히 해명해주는 멋진 이야기인데,



이러한 시적 변신, 변용의 감각이 모더니즘 문학 이후로 점차 퇴보하여 오늘날에는 거의 상실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실제로 모더니스트들은 자기의 예술에 대하여 끊임없는 회의에 시달렸다.



필자는 그런 회의를 표현하지 않은 모더니스트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불신의 마음을 갖고 있다.



<When Virginia Woolf lamented that "We're not as good as Keats", T.S.Eliot replied, "Yes we are...We're trying something harder".



버지니아 울프가 "우리는 키츠만큼 훌륭하지 않아"라고 탄식하자 엘리엇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우리는 더 어려운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으니까" 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



제임스 조이스가 <피네간의 경야>를 집필할 때 극심한 자기 회의에 시달리던 중,



밤에 산책을 나가 강물 소리를 듣고 자기가 쓰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되찾았다는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이런 일화는 휠덜린의 "대가에게 위압감을 느끼거든, 보다 더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여라!"라는 충고를 떠올리게 해주는 듯하다)



사실 이 대담한 실험가들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자기 확신을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더니스트들의 문학관과 비평안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할 까닭은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거쳐 모더니즘 예술의 창조적 동력이 거의 완전히 소모된 오늘날에,



우리가 예술에 있어 '역사의 종말'과 같은 견해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모더니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현대적 독법과 감수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 문학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한한 논의가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그 주요한 특징으로 '파편성'을 얘기해보고 싶다.



모더니스트들의 형식 실험은 사실 고전적인 유기적 세계의 해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의 파편들 하나하나가 무엇을 겨누고 있으며, 어떤 파괴적 의미를 갖는가는,



고전 문학의 유기적 세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예술의 비인간화"는 모더니즘을 이해하고자 할 때 매우 도움이 된다.



'비인간화'란 일반적으로 오늘날 현대 예술의 가장 지긋지긋한 속성으로 생각되는데(파편성, 기계성, 주관성이 극한에 이름으로써 성취되는 절대성 등등),



조이스보다 1살 어렸던 저자는 이 책에서 '비인간성'을 모더니즘의 가장 혁명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으로 해석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메모에서 탄식처럼 '우리 모두 인간적으로 됩시다'라고 썼는데, 이는 매우 완고한 고전주의적 감각의 표명으로 읽힌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미적 취향은 전반적으로 '브람스에게서조차 기계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고 할 정도로 고전주의적이었다.



(세기말 빈의 고전주의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조이스보다 4살 연하, 비트겐슈타인보다 3살 연상인 빈내기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은 조이스의 영향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면서 모더니즘의 "문화 붕괴" 현상을 다룬 매우 훌륭한 걸작이다.



브로흐는 현대에 가치 체계의 총체성과 수직성이 붕괴하여 너무 많은 가치들이 '이방인처럼 병립하는' 문화의 파편화 현상을 해부하면서 소설 형식의 총체성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한낱 여고생에 불과하지만, 21세기 문학의 과제는 모더니즘에 의해 파괴된 고전주의적 감각의 복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극도로 파편적인 것이 된 현대시를 정화하는 일이다.



(모든 문학은 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시적 언어와 비전은 문학의 '핵심'이자 '씨앗'이다.



견고한 시적 감각 없이 산문 언어가 자기 확신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산문이 위대한 시인이었던 푸쉬킨과 레르몬토프의 산문에 비해 다소 정신적 진폭이 협소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요즘의 한국 현대시는 파편적 언어 감각의 극단적 예시들을 보여준다.



한국어를 통해 현대시를 정화한다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대가가 나타날 수 있을까.....?



필자는 언제 나타날지 모를 그러한 대가를 기다리고 있다.



독갤러 오빠들과 김우창역 키츠를 읽으며 그러한 대가를 함께 기다릴 수 있다면 좋겠다.



듣는 가락은 달다. 허나 들리지 않는 가락은 더욱

달다. 하여 고요의 피리를 마냥 불어라.

감각의 귀가 아니라 보다 고귀한 것,

영혼을 위하여 곡조 없는 노래를 부르라.

나무 아래 젊은이여! 너는 노래를 그칠 수 없다.

그 나무 또한 잎 질 날이 없겠구나.

대담한 연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입맞출 수 없겠구나.

너의 소원이 곧 이루어질 듯하건만 - 그러나 슬퍼 마라.

행복에 못 미치는 대신 그녀 또한 이울지 않으리.

영원토록 너는 사랑하고 그녀 또한 아름다우리.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

Are sweeter; therefore, ye soft pipes, play on;

Not to the sensual ear, but, more endear'd,

Pipe to the spirit ditties of no tone:

Fair youth, beneath the trees, thou canst not leave

Thy song, nor ever can those trees be bare;

Bold Lover, never, never canst thou kiss,

Though winning near the goal yet, do not grieve;

She cannot fade, though thou hast not thy bliss,

For ever wilt thou love, and she be f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