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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어두운 들판위에서 항구처럼 밝은 마을에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한번 뒤를 돌아보고", 말을 기둥에 매고 흐릿한 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올려다 본 뒤, "마치 그 일대의 배수구로 기능하는 듯한" 술집으로 들어감. 이 시점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함. 죽음이 다가오면 더 이상 현재를 회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모든 순간은 영원한 길이를 가진 체험으로 늘어짐.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진짜 체험을 할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발짝 떨어져서 차분히 파악할 수 없음. 시야가 흐릿해지고 다른 사람의 말이 잘 안들리기 시작함. 내가 알고있는 것 바깥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주마등이 시작됨.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부가 가장 상징적이고 꿈같을 수 밖에 없음



술집에서 남자는 판사와 마주치고 판사는 '네 영혼을 되찾으리니'라고 성경을 인용하며 니체풍의 전쟁에 관한 철학을 설파함. 대충 요악하자면 투쟁은 행동을 통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춤과 같은 것이고, 춤을 추지 않겠다면 무대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이야기임. 니체는 춤에 관해 이렇게 적었음. "근육을 통제함에서 느껴지는 힘, 부드러움과 움직임의 즐거움, 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없다면 삶은 실수일 것이다. 나는 춤을 추는 신만을 믿겠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춤추는 이들은 미친 것으로 보였다.", 판사의 "전쟁이 신이다"라는 대사, 그리고 폭력에 참여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무언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묘사를 보면 매카시는 니체의 해석으로서 전쟁과 춤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낸 것 같음. 물론 핏빛 자오선이 니체를 성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음. 니체는 과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세계시민주의적인 반면 판사는 과학적, 환원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인물임. 그리고 판사가 설파하는 것들은 니체 이전에도 있었을법한 무신론적인 철학임. 하지만 도덕을 인간의 발명품으로 보는 견해와 황무지의 명백한 도덕적인 공백은, 겉보기에 허무주의적이란 점에서 니체를 연상시킴. 물론 니체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음. 매카시는 아마 칼 융을 읽었을테고, 서문에서 17세기 독일 신비주의자를 인용하기도 함. 간접적으로 니체를 연상시키는 철학에 도달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음


판사와 함께 소설의 다른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영지주의적인 세계관임. 모든 생물들에게 이 세계는 낮설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불이나 별이나 눈동자 뒤의 어둠속에서 비롯된 생명의 혼은 죽는 순간까지 지상에 속하지 않음. 소설의 첫장에서 아이가 태어나던 날 사자자리 대유성우가 내렸다고 묘사됨. 그렇기 때문에 소년은 손에 끝없이 피를 묻히며 살아왔음에도 양심, 가치, 혹은 영혼만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판사가 마지막으로 투쟁을 권유했을 때, 타락을 권유했을 때 거부할 수 있었던 거임. 더 로드에서도 매카시는 주제의식도 영혼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사람의 악행은 세계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임을 보이고자 해. 폭력과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넘긴다면 핏빛 자오선은 희망찬 소설로 읽힐거야.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남자는 열두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의 형을 쏴서 죽임. 아이는 자신을 고아로 만든 남자의 얼굴을 눈에 새김. 그리고 1833년에 이어 1866~1868년에도 사자자리에서 유성우가 내렸어. 소설의 결말부를 1878년로 설정한 것은 남자의 영혼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측해본다



마지막으로 핏빛 자오선의 에필로그를 살펴봐야 함. 에필로그에서 매카시는 평야에 쇠막대로 구멍을 뚫으며 '한 구멍씩 신이 그곳에 두신 바위를 불타오르게' 하는 사내를 보여줌. 판사가 서부시대의 시대정신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인 만큼, 여기서 각 구멍들 또한 시대정신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음. 그렇다면 매카시의 역사관은 다음과 같음


'...족적은 보이는 세계의 끝자락 너머로 이어짐에 이는 무언가의 연속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어떤 법칙의 증명, 나열이나 인과의 작용처럼 보임으로 마치 각개의 온전하고 둥근 구멍이 그 전의 구멍에 존재를 빚진 듯...'


'온전하고 둥근'이란 표현이 중요함. 각 시대는 반드시 저물지만 자기 안에서 마치 '둥근 알처럼' 온전하고 완벽함. 절정에 달한 그 순간, 한 시대, 한 사람의 삶은 완성되며 완결된 형태로 자기 안에서 완전한 가치를 가짐. 곧 판사가 남자를 죽이는 순간 판사의 시대는 절정에 달했고 죽음을 맞이했던 거야. 위에서는 남자가 영혼을 지키기 위해 맞써 싸우지 않았다고 했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남자가 죽은 1878년은 무법자의 시대가 끝나가던 때였고, 남자는 그 전에 해왔던 것처럼 문맹인 채로 사막을 떠돌며 살아갈 수만은 없었을 거임. 1850년에 서부의 바에서 사람을 죽이면 기껏해야 친구가 복수하러 쫓아올 뿐이지만 1878년에 바에서 사람을 죽이면 주 정부 경찰에게 수배당하게 됨. 고로 남자가 죽어야만 했던 까닭은 그가 속한 시대가 끝났기 때문임. 남자는 판사의 마지막 남은 목격자였고 판사가 남자를 죽이며, 혹은 남자는 자기 안의 판사와 함께 죽으며 한 시대를 끝맺을 수 있었음



판사와 대화를 마친 뒤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창녀를 찾아나서고, 심지어 침실에서 울었는지 위로받기까지 함. 죽음을 직감하면 여자를 찾는다는, 후손을 남기겠다는 본능이 작동한다는 속설을 차용한 거야. 이렇게 성욕을 통해 시점은 상징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됨. 그렇기 때문에 죽으러 가는 장소는 가장 현실적인 장소인 화장실일 수밖에 없었음. 만일 남자의 죽음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한다면, 폭력의 죗값이 죽음으로 되찾아 온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음. 옛날에 죽였던 누군가의 자식이 복수를 하러 왔다던가, 아니면 그냥 미친 사람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던가. 하지만 남자에게 진짜로 덮쳐왔던 것은 그저 눈먼 총알이 아닌 남자가 수십년간 행해왔던 폭력이었고, 남자에게는 정말로 판사가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