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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1788년 단치히 시의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음. 쇼펜하우어는 견문을 넓히는 것이 좋다는 부모의 견해에 따라 어렸을 때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했고 가업을 잇기 위해 상인 견습을 하기도 했음.
점차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괴팅겐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철학으로 전향, 1811년 베를린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충족이유율에 관한 논문으로 1813년 박사학위를 받음. 그 뒤로 볼프강 폰 괴테와 교류하며 철학 연구를 계속했으며 1818년,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함.
의표세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르면 칸트 철학의 자연스러운 연장임. 쇼펜하우어는 의표세를 통해서 다른 칸트 연구가들을 비판하고 칸트 철학의 여러 개념들을 명료하게 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씀.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은 객관 사이에서만 작용하며, 주관을 객관에서, 객관을 주관에서 연역해 내려는 시도는 충족이유율의 범위를 잘못 적용한 것이고, 칸트의 물자체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해. 그리고 칸트 철학을 전개하는데에 있어 주관에게 있어서의 객관인 표상이 올바른 시작점이라고 주장함.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칸트의 도움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야.
1. 삶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절대적인 도덕이나 영혼의 구원, 그리고 삶의 일반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아. 그 대신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의지의 좌절, 그리고 쾌락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해.
우리는 뭔가를 얻고자 노력할때 그걸 얻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느껴.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기대는 사라지고 허무감이 그 자리를 대체하며, '그렇기 때문에 동화들은 그 뒤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로 그 뒤의 지루하고 긴 삶을 생략한다'라 말함. 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우리는 대상이 우리가 의지를 투영한 대상과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깊은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고도 할 수 있음. 헛된 기대와 희망을 걷어내고 본 세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욕망, 그리고 의지의 좌절, 지루함으로 이루어져 있어.
쇼펜하우어는 부모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과 성욕을 못이겨서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차 있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이를 낳기 때문에 이기주의자들이며, 만족은 허깨비로서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진자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서 생각할 줄 모르고, 대중예술은 지루함에 못이겨 의지와 욕구를 자극시키는 어리석은 짓거리며, 멍청한 사람들은 반응이 없으면 즐거움을 못얻기 때문에 동물원의 동물들을 괜히 자극하고, 이 도대체 생각이라곤 없는 멍청이들은 관광지에 방문해서 분수대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못참고 거기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 넣으려 시도하며, 들으라는양 공기를 찢는 마차의 채찍 소리가 시끄러워서 도대체 집에서 사색을 할 수가 없고, 운명이라 불리는 것은 대게 자신의 멍청함에 불과하고, 세상과 삶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 아니며 오직 고통만이, 오직 좌절과 불만족만이 실재한다고 말해.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노인들의 얼굴은 깊은 실망으로 주름져 있다." 의지와 의지의 객관화로 이루어진 쇼펜하우어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는 불만족의 상태, 즉 고통이며, 쾌락은 그저 고통의 일시적인 부재에 불과할 따름임.
2. 의지를 잠재워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의지 중에 가장 강한 의지인 성욕을 종족 보존의 의지라고 부름. 현대의 개념으로는 유전자라고도 불림. 쇼펜하우어는 유전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키 작은 사람을 키 큰 사람에게 이끌리게 하고, 성격이 급한 사람을 느긋한 사람에게 이끌리게 한다고 주장해. 하지만 결혼 후에 성욕이 식고 나면, 배우자가 나와 전혀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매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후회하곤 함. 쇼펜하우어는 라틴어로 이렇게 적었음. Illico post coitum cachinnus auditur Diaboli (성관계 직후에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 자살로도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통 자살은 강렬한 의지가 좌절된 끝에 의지가 깃든 생명체가 자신을 죽여버리는 행위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절망해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을 예시로 들 수 있음. 의지는 인과율을 초월한 세계의 본모습으로써 사람의 죽음으로는 멈추지 않아.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잠들기 직전에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철학적인 공포를 느끼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큰 의지에 사로잡혀서 죽음에 관해서는 그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기만 할 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어도 의지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의지 자체를 죽이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 쇼펜하우어는 종교인이나 예언가가 아닌 철학자기 때문에 여기서 논증을 포기해. 의지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예술품을 볼때 자신을 잊어버리고 고통마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으며, 불교에서 집착을 포기하면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점을 들어. 물론 열반에 어떻게 들 수 있는지, 아니면 열반이 성공한 사례가 있는지에 관해선 쇼펜하우어도 딱히 아는 바가 없어.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죽음은 자기파괴도 단념도 허무주의도 아닌, 그저 자신의 의지에 관하여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마치 예술품을 볼때처럼 관조하는 것에 불과함. 열반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형이상학에서 내려온 뒤, 의표세는 이렇게 끝을 맺음.
"우리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 남는 것은 의지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닐 것이란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의지가 반대로 작용하여 자신을 부정해버린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생생한 이 세계는, 태양과 은하수, 이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3. 개별화의 원리를 벗어나라
쇼펜하우어는 이타적이거나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어. 쇼펜하우어는 소음과 자기 어머니를 싫어했고 여자와 대중을 경멸했어. 35세때 쇼펜하우어는 옆집에 사는 중년 여성이 자기 집 문앞에서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고 있자 자리를 옮기라고 요구했고, 요구가 거절당하자 집에서 막대기를 들고 나와 이웃을 계단 밑으로 밀어버렸어. 법원에서는 신체적 위해에 대한 위자료로 매년 50탈론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음. 20년 후 쇼펜하우어는 이웃의 사망증명서에 Obit anus, obit onus(여자가 죽었고, 짐을 덜었다)라 끄적였다고 함. 어머니인 요헨나 쇼펜하우어는 아들의 거만한 태도와 예민함을 견딜 수 없었고,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유명한 소설가인 어머니의 아들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기분 나빠했어. 가족과 절연했던 쇼펜하우어가 다시 어머니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중 어머니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단 것을 들은 뒤였어. 의표세에서 쇼펜하우어는 인류애나 윤리를 오직 부차적인 문제로서만 다루고 있음.
한편 쇼펜하우어는 개나 고양이의 순수함을 좋아했고 노인이 되었을 때도 동물원에 방문하곤 했음. 쇼펜하우어는 아트만(영혼)이라고 이름지은 푸들과 매일 산책을 했고 프랑크푸르트 동물원에 오랑우탄이 전시되자 친구들에게 가서 꼭 보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어. 쇼펜하우어는 도덕에 관한 수필에서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관행은 서양 철학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모든 것에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도덕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주장했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인간이란 종의 의지가 기회를 얻어 표출되고 있는 현상에 불과해. 한 벌레의 생은 다른 벌레의 생과 거의 다른점이 없지만,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인 우리 인간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종의 한 표현형 중 하나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인간의 고통과 쾌락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게되고 세계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투쟁으로 가득차게 됨. 이기심은 물론 심지어 악의조차도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의 처지를 상대적으로 나은 것으로 여기기 위한 바로 그 목적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임. 개별화의 원리, 그리고 뒤따르는 이기심은 단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 세계의 일시적인 현상으로써 일어나는 것일 뿐이고, 각자의 이기심 뒤에는 공통된 의지, 공통된 좌절과 고통이 있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윤리관임. "우리가 정의 대신 자비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이며 동일한 실체라는 궁극적인 진리를 동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기심과 악의, 동정심 등은 인간 행동의 기본적인 동기임. 동정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은 죽음으로서 세상의 일부만을 잃지만, 개별화의 원리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끝나는 날,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됨. 따라서 언젠간 죽게될 우리 인간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이기심과 악의로는 어떠한 만족에도 도달할 수 없음. 사실 쇼펜하우어에게 동정심이란 범속적인 것이고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만, 쇼펜하우어가 세계를 의지로 본 것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눈먼 충동과 고통에 깊은 동정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거임.
의표세는 출간 이후에 거의 팔리지 않았고 쇼펜하우어는 일생에 걸쳐 자신의 책을 편집하고 내용을 덧붙였음. 대학에서 시간강사 일을 하기도 했지만 강의가 인기를 끌지 못하자 결국 그만뒀고, 자연과학과 철학에 관해 꾸준히 연구를 했지만 역시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음. 1851년, 한국에서 인생론으로 알려진 수필집 Parerga und Paralipomena(부록과 생략)를 출간한 뒤에서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 널리 읽히기 시작했음. 1853년, 인생론을 영어로 번역한 John Oxenford는 쇼펜하우어를 독일 철학의 우상파괴자라고 논한 에세이를 썼고 이 에세이가 독일 신문에 실리며 쇼펜하우어는 무명 철학자에서 벗어났음. '쇼펜하우어주의자'라는 표현이 거론되기도 했고 그를 주제로 한 경연대회도 열렸으나 쇼펜하우어 본인은 젊은 추종자들이 자신에게 아첨하고 있다고 느꼈음. 그는 여생을 자신의 저서들을 다듬으며 보냈고, 의표세 3차 개정판이 출간된지 1년 후인 1860년, 자택의 소파 구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함. 검은 묘비에는 그저 Arthur Schopenhauer라고만 새겨졌고, 악력이나 생몰연도도 적히지 않았다고 함.
쇼펜하우어의 삶처럼 의표세도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음. 쇼펜하우어는 이루고자 노력해야 하는 이상향을 제시하려 하지도 않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짚어내지도 않음. 그저 세계를 의지로서 내보이고 있을 뿐임. 요컨대 시간이나 공간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있는, 역사나 근래의 사건들을 신경쓰지 않는 책임. 이 이유 때문에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쇼펜하우어는 독립된 사상가로써 꾸준히 읽히고 있음. 첫 생명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고통은 항상 있어왔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인류를 정의하는 수많은 고통과 충동, 의지가 결코 사그라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면, 쇼펜하우어가 보았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계속 유효한 채로 남을 거라고 생각함.
가장 작품내 관철하는 내용은 맹족적인 삶을 살지말자 이거같음.
맹목
요약이라기엔 부언이 많은 듯하지만 깔끔하게 잘 씀. 차라리 소개라고 하면 어땠을까. 추천
잘썼다 진짜. 의표세 읽기 전에 이거 읽으면 도움 많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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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렇게 글 잘쓰고싶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