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여름, "즐거운 학문"에 대한 모든 종류의 연구, 21[2]


나의 피와 성은 폴란드 귀족의 혈통에서 유래한다고 들은적이 있다. 그들은 니에츠키라 불렸으며 약 백년 전쯤에 고향을 떠났고 귀족 신분도 포기했다. 견딜 수 없는 종교적 억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그들은 소위 개신교도들이었다. 내가 소년 시절에 나의 폴란드 혈통에 자부심을 전혀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 내 안에 들어 있는 독일의 피는 오로지 욀러 가문 출신인 나의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크라우제 가문 출신인 친할머니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 몇 명의 폴란드인들이 나를 자기들의 친척으로 착각하여 폴란드어로 인사를 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폴란드와 나는 상관이 없으며, 나는 스위스인라고 자기소개를 하자 어떤 사람이 나를 오랫동안 슬프게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옛 종족 그대로이지만, 마음이 어디론지 돌아섰다."


내가 소년 시절에 마주르카를 작곡해놓았던 조그마한 노트에는 "우리들의 조상을 기억하며!"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나는 갖가지 평가와 선입견 속에서 그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폴란드인들은 슬라브 민족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신사적이라고 생각했다 : 슬라브인들은 독일인보다 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심지어 독일인들이 슬라브인들의 피와 대규모로 혼합됨으로써 비로소 재능있는 민족들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했었다. 지체 없는 거부권 행사로 어떤 회의의 결정을 뒤집는 폴란드 귀족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폴란드인 코페르니쿠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결정과 이목에 반대하여 이런 권리를 가장 품위 있고 최대한으로 사용한 사람으로 보였다. (...)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시골 개신교 목사였음. 니체를 제외한 니체의 가족들은 독실한 신자였음.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네섯살때 갑작스러운 정신착란을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 니체는 자신또한 같은 방식으로 죽게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결국 44세때 유전성 뇌졸증으로 추정되는 중병에 걸려 불구가 되었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고향에서 여생을 보냄. 니체는 본인이 후에 고귀한 노예에 불과할 뿐이라고 평한 학자로서 교육받은 사람이었으며, 위의 글에서도 보이듯이 본인이 독일의 중심지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독일인들을 낮게 평가했음. 버트런드 러셀은 니체에 관해 이렇게 평했음


"니체에 따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나는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에서, 혹은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전기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때 그러듯, 니체를 볼때에도 객관성의 관용을 배풀어야 함. 니체를 살아있는 사람인양 가장 엄격한 잣대로 비판하며 동시에, 니체의 말과 삶의 모순을 들며 까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함. 니체의 영향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전자의 방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물론 합당하며, 니체는 역사속의 한 사람이었기에 후자의 전기적인 방법으로 니체를 깔수도 있음. 하지만 니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끝없이 후회하고 고민했고, 사실 전사도 정복자도 아닌 일생을 무명으로 살았던 문헌학 교수에 불과했음. 마치 니체가 거인이나 왕이라도 되는듯이 돌을 던져대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