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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죽음에 대해 진솔하게 다룬 작품. 병에 들어 고통 받으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어 하늘이 벌 하는가 이런 식으로 따지는 게 떠올랐다. 동서고금 천벌이란 말도 있고, 그렇게 고통을 죄에 따른 벌과 엮는 경향이 있고, 힌두교와 불교 같은 경우는 전생에 업까지 거론한다. 이유없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잔인하고, 정의롭지 않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세상에 잔혹한 면모가 있다는 것 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잔혹한 면모도 헌신과 희생이라고 합리화 가능하다. 애국이란 프레임으로 전장터에서 죽는 것도 종의 번식이란 숙명으로 출산도 허용 된다. 하지만 세상에 정의가 없다면 좀 허무하고 믿을 구석이 없을 거 같다. 세상에 도의가 없고 마땅히 행해야할 방향성을 상실한다.
그래서 죽음을 테마로 다루지만 동시에 삶에서 마땅히 행해야할 도의적인 측면도 암시한다. 이반 일리치도 죽기 직전에 자신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을 보면서 삶을 놓아주기로 결심하고 짖눌렸던 허탈감이나 미련 따위를 버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세상과 작별을 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가 벌을 받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한 이후로, 스스로 허튼 생각이야 하면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잠재의식은 폭주하였다. 몸이 팔팔한 시기에는 브릿지 게임이나 공무에 몰두하면서 잊을 수 있엇지만 누워서 남는 게 성찰할 시간이다 보니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상태에도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계속 그런 불쾌한 기억을 무시하려하지만 강압적으로 곱씹어서 상기하게 된다.
자신 인생이 자존심과 허영심 충족으로 이뤄진 거짓된 인생이엿다는 점을 인정하고, 주변인들의 거짓까지도 구역질을 내며 참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종교에서 도덕과 진리를 엮듯이 그런 삶은 본질적 삶이 아니였다고 깨닫는다. 겉으로 도덕적인 심판을 가하는 법관에 존중 받고 그에 상응하는 풍요와 인생에 쾌락도 즐길 줄 아는 삶이 전부 본질적이지 못하고 거짓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가 본질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입장이 조금 모호하다. 긍정적으로 묘사된 게라심에게서 단서가 있긴 하다. 하도 톨스토이 견해로는 거짓되다보니 살아생전 받던 존중도 예의상 드러낼 뿐. 주변인들 속으로는 전부 자기 잇속 계산 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이반 일리치의 인생관은 즐겁고, 편안하고, 법도에 맞게 이 세가지로 요약 된다. 즉 세상 시류 흘러가는 데로 순응하여 사는 것 뿐이다. 그렇게 편안하게 있다가 채찍 한번 맞으니까 정신적으로 훈육이 되고, 반성을 하게 된다.
한번씩 쓴맛을 보는 게 어른이든 아이든 내부에서 안이함과 교만함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나오며 훈육이 된다. 대충 세상 시류 맞춰 살아가면 문제 없겠지 이런 생각도 마찬가지로 안이하고 교만한 생각이다. 톨스토이 작품에서 법관이나 의사가 등장하면 항상 부정적으로 표현된다. 각각 도덕과 생명이라는 중대한 과업을 다루면서 안이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 지들은 쓰라림 없고 다루는 피고인이나 환자만 말못할 쓰라림을 겪고 있으니까. 고통이 있으면 심각한 것이고, 심각하면 진지한 것이다. 적어도 도덕과 생명의 본질을 다룰 때는 진지한 태도가 견지되는 게 합당하다. 톨스토이가 보기엔 법관과 의사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고통 받은 자의 도덕 설파가 먹혀들엇을지도 모른다. 배부른 부르주아보다 비천한 게라심에서 더 마음이 끌린 것도 고된 삶과 연관이 있다. 도덕과 생명에 대해 더 본질적으로 파악한 인물로 보였다. 그리고 주인공 자신이 갈구했던 본질에 대해 영감을 줘서 끌렸던 것이다.
불로초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