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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을 감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어떤 인물인지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장부터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빌리 필그림은 화자인 작가 본인과 일부 경험을 공유하나 확연히 구별되는 가치관을 가졌으며, '트랄파마도어적 시각'을 수용하여 모든 일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극도로 무기력하며 그렇기에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히어로도 안티히어로도 아닌 비영웅적 인물이다.
독자가 잊을 만하면 이야기 속에 작가 자신을 등장시키며 빌리 필그림과 작가 자신이 서로 다른 인물임을 상기시킨 이유는 독자가 빌리 필그림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1장에서 작가 본인은 자식들에게 단호하게 '절대 대학살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반면 빌리 필그림은 아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다는 얘기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작가 스스로 도입부에서부터 이 책을 반전 소설이라 밝혔으면서도 주인공이 전쟁에 무덤덤한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모순을 느끼게 하며, 그 모순에서 비롯된 혼란은 독자가 빌리 필그림의 태도를 곧이곧대로 수용하려 할 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독자가 빌리 필그림의 어떤 면을 비판적으로 보길 원했을까? 그것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여기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극도의 결정론적 시각일 것이다. 모든 일에 수동적인 빌리 필그림이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열정을 보이는 순간은 이런 '트랄파마도어적 시각'을 주장할 때 뿐이기 때문이다. 빌리 필그림의 주장은 1장에서 작가와 해리슨 스타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반전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자 '차라리 반빙하 소설을 쓰라'는 해리슨 스타의 모습은, '드레스덴의 비극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말에 쉽사리 수긍해버리는 빌리 필그림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전쟁을 막을 수 없는 것, 때로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빌리 필그림을 통해 풍자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빌리 필그림은 전쟁에서 매력과 합리성을 걷어내는 역할을 한다. 전통적인 전쟁영웅의 모습을 보여준 미군 포로 에드거 더비가 허무한 죽음을 맞고, 용감하게 맞서 싸워야 할 무시무시하지만 매력적인 적은 끝끝내 등장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며 호감이 가지 않는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전쟁은 영웅과 악당의 싸움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소년들이 휘말린 이야기였고, '절대 폭격당할 일 없다'던 민간인의 도시 드레스덴은 폐허가 된다. 그렇게 작가는, 1장에서 친구의 아내 메리 오헤어와 약속한 것처럼, 전쟁에서 매력적인 중년 배우들인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이 맡을 역할을 없애버렸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 값싼 신파 대신, 전쟁의 볼품없는 모습과 아이러니를 정면에 배치함으로써 말이다.
한때 빌리 필그림의 '삶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자'는 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결정론을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부서진 사람이다. 모든 죽음을 가볍게 볼 수 밖에 없게 된 가여운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존경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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