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글자수 제한때매 결론부분을 많이 줄여서 끝에갈수록 글이 이상해지긴 함
모든 사진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의지이다. 피사체를 카메라 초점에 두고 셔터를 내린 그 순간, 이미 사진가의 주관에 의해 순간은 선택되어 필름에 기록된다. 나는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의 주장에 동의한다. 사진은 현실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세계를 투명하게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사진은 본 것을 기록하려는 노력에서 탄생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사진은 눈의 확장이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솔직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예시를 듣고 생각해 보시라.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에 두 친구가 발을 들인다. 한 명은 이슬람교도이고, 다른 한 명은 기독교도이다. 둘은 모스크 안을 한동안 구경하고, 생각에 잠긴 채 나와 대화를 나눈다. 이슬람교도는 천장의 아치들 사이 걸린 코란의 글귀를 보았고 거기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위대함을 느꼈고, 전 동남유럽을 호령했던 오스만 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생각하며 잠겼던 감격의 감정을 늘어놓는다. 반면 기독교도는 다른 말을 한다. 자신은 같은 천장의 아치를 보며 몇 백년 전 성당이었을 때 벽 사이에 가득했던 야훼의 영광을 느꼈고, 장엄한 주춧돌을 보며 찬란했던 동로마를 생각하고 감동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를 방문하였고, 같은 시간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보고 느낀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것은 본다는 행위가 의지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 있으면서, 존재자는 어떠한 단면을 볼 것인지 선택한다. 그리고 그 단면의 이미지를 날 때부터 형성되어 온 주관을 거쳐 하나의 감정으로 재생산한다. 이렇게 경험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존재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시각의 확장인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사진가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보고, 셔터를 눌러 필름에 기록한다. 세계를 볼 때부터 사진가의 의지는 어떠한 것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의지에 의해 렌즈에 담긴 이미지를 필름에 기록한다.
사진은 의지가 담은 목적을 가진다. 사진은 기록물로서, 사진가가 보았던 세계의 단면을다른 존재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의 성취가 그 목적이다. 한 전장에 있는 다른 신념의 종군기자들은 각자가 알리려는 현실의 단면을 선택하여 필름에 기록한다. 같은 공간에서 사진은 탄생하였지만, 담고 있는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순간과 서로 다른 장소이다. 사진을 보는 이들은 전장을 보려는 의지를 제한적으로 실현한다. 사진을 보는 이들은 오직, 세계의 한 단면의 이미지를 자신의 관념을 통해 경험으로 재생산하는 의지만을 실현한다. 어떠한 단면을 볼 것인지의 선택은 사진가의 몫이다. 사진을 보는 이들은 오직, 사진가가 세계를 보려는 의지 안에서 경험을 만든다. 세계의 어떠한 단면을 볼 것인지 선택하는 행위를 사진가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이오지마에 계양된 성조기]라는 사진이 있다. 2차세계대전 말, 일본군의 최후의 보루였던 이오지마 섬을 혈전 끝에 끝내 점령한 미 해병대가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꽃는, 태평양전쟁을 대표하는 사진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최초에 깃발을 계양한 후, 다시 찍힌 사진이다. 섬의 심장인 수리바치 산 정상을 정복했을 때 로워리 하사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필름에 남긴다. 하지만 계양했던 깃발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작았던 모양인지, 하사는 더 큰 깃발을 가져와 다시 사진을 촬영한다. 그리고 이 사진은 태평양을 건너 전미의 신문의 전면에 실리고, 일억 사천만 미국인들은 막 섬을 점령한 해병대원들의 위용을 느끼며 감격한다. 그러나 이들이 본 것은 섬을 점령한 순간이 아닌, 그 후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로워리 하사에게 전장을 보는 행위를 위임하고, 로워리 하사의 의지는 깃발을 두번째 계양한 후의 순간을 보기로 선택한다.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은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알리려 총에 맞는 병사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쟁 사진 중 하나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후에 연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는 전 세계가 스페인 내전의 공간에서 어떠한 단면을 볼 지를 선택할 이로 카파를 선택한다. 카파의 의지가 선택한 단면은 총탄이 빗발치는 참호 너머 안전한 후방에서 자신의 자시사항을 듣고 총탄에 맞은 연기를 하는 병사가 있는 순간이었다.
<<타인의 고통>>에서 필자는 사진은 기억을 만드는 매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렌즈가 비춘 곳 이면은 주목할 것을 외치고, 사진가들의 의도에 경도되는 것을 경고한다. 나는 저자의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사진을 보는 것은 사진가의 의지를 보는 것으로, 결코 현실을 비추는 투명한 창이 아니다. 다만 사진가의 캄캄한 의지에 내재한 기억의 한 순간을 보는 것일 뿐이다. 사진을 보는 것이 현실을 투명하게 보는 것이라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진은 친구가 수다스럽게 묘사하는 광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하나의 언론이다. 황색언론의 가짜뉴스를 보고 실린 사진을 보며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저 기사를 쓴 기자의 의지 속의 새카만 스튜디오의 이미지를 볼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진이 세계를 투명하게 비추는 인류의 신성한 발명품이라 감탄한다. 그러나 그들이 숭배하는 사진술은 신성하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 그저 인간의 의지의 표출에 불과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보는 것 자체가 의지의 표출인데, 어떻게 세계를 투명하게 어떠한 의지에서 뻗어 나온 관념과 목적을 배제하고 본다는 말인가?
zz그대로 배껴서 f먹여야겠다 수고해라~
사진이 대중매체의 중요한 시발점이란걸 아시나요
그 쓸때 아무생각없이 씨부린거라서 뭐랄까,, 글썼을따의 목적이 그냥 “교수님저는 이만큼 사색했어요 학점주세요”이기 때문에 내가 쓴 글이 조리에 맞는지는 전혀 생각안함. 그리고 대중매체라는게 그 자체로 언론인데, 사진이 대중매체의 시발점이라는 사실과 내가 쓴 글이 상충되는가? 이건 잘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