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무엇이든,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주체, 즉 자기존재를 벗어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존재 역시도, 먼저 자기존재라는 관찰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 후 인식주체를 벗어난 존재에대해 논하는것이 순서일것이다.
세계는 연속이지만 존재는 비연속적이다
연속적인, 절단할수 없고 구분할수 없는 세계로부터 존재를 추출하는것은 인식이다. 다시말해서 존재란, 타존재를 인식하는 존재에게 존재로 인식될때 비로소 존재로서 있게 되는것이다. 타존재를 인식하는 존재(인식주체)는 거대하고 이해할수 없는 두루뭉술한, 그저 존재한다고 미약하게 이해되는 세계로부터 나름대로의 이해로 대상들을 구분해낸다. 이런 구분은 인식이며, 인식을 통해 구분된 대상들은 인식주체에 의하여 이름붙여지고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쉽게말해서, 인식주체 전에는 지면의 돌과 지면 사이에 구분이 없다. 지면과 지면위의 돌을 구분한것은 인식주체이다. 인식주체를 통해서 지면과 돌은 구분되며 서로 다른 존재로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인식주체의 세계는 이런 분리를 거듭해 형성된다.
그렇다면 인식주체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식대상은 인식주체에게 인식되아 존재하게 되는데, 인식 주체는 무엇에 인식되어 존재하게 되는가?
인식주체는 스스로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인식이란 현상, 즉 인식대상과 인식주체 간의 인식이란 관계를 통해 자기존재를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인식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 실체로서의 존재에대한 증명이 아니다.
인식하는 내가 통속의 뇌이든 실재이든 세계와 관계맺는 인식만은 분명히 존재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것은 어느쪽이 인식주체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인식이 이루어지는 관계가 형성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인식의 본질은 상호작용이다. 두 잠재적 존재는 둘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동시에 존재로서 있게 된다. 상호작용이란 상대 대상, 대상과 자신존재의 관계, 그리고 관계하는 자신존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회의 끝에 회의하는 자신만이 남는다 선언한다. 그러나 인식존재는 확고부동하게 홀로 존재하는 있음의 개념이 아니다. 인식존재는 타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신존재를 자각하게 됨을, 그렇기때문에 존재는 홀로 존재하는것이 라니라 관계를 통해서 존재하게되는것임을 말하는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자면, 존재는 '있음'이 아니라 '관계함'이다.
그럼 사고 실험에 들어가보자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진, 오직 인식만 있는 선천적인 식물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가 생각하기엔 아무것도 그와 관계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만은 존재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스스로 본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비슷한 얘기인듯 엘레베이터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그 안의 사람이밖을 보지 못할 때 엘레베이터가 등속도로 움직인다면 그 사람은 엘레베이터가 움직임을 인식할 수 없다
글에서 설명한 인식은 반드시 물리적인 대상에만에 한정되는것은 아님. 오히려 인식의 대부분은, 그리고 본질은 물리적 실재가 아닌 존재로 인식된 대상의 속성이라 할수 있음. 즉 우리는 인식주체를 벗어난 실재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지. 감각은 환영일수도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대상의 속성들을 통해서 대상을 세계와 구분해 의미있는 무언가로 바꾸어 이름붙였
음. 그렇기때문에 인식함이란 실재를 느낌이 아니라, 관계를 맺음이라고 한거.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물리적 실체를 본게 아니고 세계와 구분하고싶은 어떤 특질을 본거지. 그 특질은 우리가 의미있다고 느낄만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질로 느껴진거고. 비유를 들자면 별자리를 보는것과 같음.
별자리는 뭘까? 사람이 인식한 어떤 모양을 갖는 별들의 집합임. 즉 (실재가 존재한다면)실재는 인간과 무관하게 연속된 세계로 있을뿐임. 그것들로부터 어떤 속성을 발견하고(국자 같이 생긴 속성) 다른 무의미한것들과 구분해 의미있는것으로 이름(북두칠성) 붙이는 행위가 세계에대한 인식이리는거지. 이런 인식을 통해 북두칠성은 존재하게 되는거고.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외부의 무엇도 느끼지 못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할까? 나는 그럴것이라고 생각함. (이건 사족인데, 자폐증의 외계에대한 무관심, 저인식과 자아에대한 희미한 인식은 관계가 있을거라고 생각함.) 본문의 내용은 존재가 존재하느냐라는 질문에대한 답이 아님. 존재(라는 개념)가 무엇이냐는 질
문에 대한 답에 좀 더 가까울거...
(1)-1 글쓴이의 주장과 데카르트의 주장의 사실상 차이를 잘 모르겠어. 관계함이냐, 존재함이냐 이름 붙임의 차이일뿐, 결국 데카르트 역시 감각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저 경험하는 내가 아니라, 의심이란 사고를 할 줄 아는 나, 그것이 진정한 존재라 주장한 거잖아?
(1)-2 그럼 여기서 글쓴이 주장에 의문이 생겨. 글쓴이는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인식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고 했지. 또한 '인식의 본질은 물리적 실재가 아닌 존재로 인식된 대상의 속성'이라고 했어.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외부의 무엇도 느끼지 못한 존재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지.
(2) 그렇다면 글쓴이가 말하는 '인식'은 물리적/외부적 경험을 포괄하는 개념이야, 배제하는 개념이야?
(2)-1 만약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물리적/외부적 경험이 전무한 통 속의 뇌는 인식이 가능한데, 어째서 선천적 식물인간은 인식이 불가능하지?
(2)-2 만약 배제하는 개념이라면, 글쓴이가 말하는 그 '인식'과 데카르트의 '의심'의 차이가 뭐지? 결국 데카르트의 '의심'이란, 인식에 대한 일종의 양상이라 할 순 없나? 글쓴이가 말하는 그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함, 혹은 그 관계함에 대한 주체 나름의 뜻매김 말이야.
(3) 이어 만약 인식이 물리적/외부적 경험을 배제하는 개념이라면, 인식은 물리적/외부적 경험 없이 얻어지는 지식이란 말인가? 그럼 이 인식은 후험적 지식인가, 선험적 지식인가?
(3)-1 인식이 후험적 지식이라면, 인식이 토대 삼는 경험이란 어디서 오는가? 물리적/외부적 경험이 아닌 경험이란 무엇이지?
(3)-2 인식이 선험적 지식이라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없게 되지 않나? 대상에 대한 인식 과정 없이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 더욱이 이 경우 역시 통 속의 뇌며 선천적 식물인간 구분 없이 모두가 인식이 가능하지 않나?
존재함을 확신하는게 아니라 관계함을 확신하는게 차이임. 사실 어떻게보면 차이가 없는것처럼 보이기도 하는거 ㅇㅈ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음. 직관적으로 느끼는 무언가는 있는데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있질 못함.
말하자면 데카르트는 회의의 끝에서 회의하는 자신 존재를 확인했다면, 난 홀로 존재하는 인식주체의 증명은 포기하고 대신 상호작용이라는 존재성의 관계를 이야기하고싶었던거. 논증의 결과가 더이상 의심할수 없는 자신이라 비슷하지만 하고자하는 말은 다른거같음.
(2) 포괄하난 개념이야. 난 사변만으로 이루어진 철학이 아닌 실증적이고 물질세계와 이어지는 철학을 추구하기때문에 과학적 실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잇는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인식에 의한 존재론도 생물학을 배제하지 않아.
사실 이 글은 전통적인 철학의 관점에서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는 글이라기 보단, 생물이 감각으로 타존재와 자아를 인식하게 된 경위를 나름대로 설명하는 글에 가깝다 할수 있어.
그러나 전통적인 철학 관점에선 우리의 인식과 감각이 실재인지 허상인지 따져보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통속의 뇌를 언급한거야.
사실 글에서 설명 못한 부분이 있는데, 빠진 부분의 핵심골자는 인식은 일종의 번역이라는거야. 만약 인식주체와는 별개의 실재세계가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오롯이 직접적으로 느끼는게 아니라는거지. 우리는 감각이란 생물적 기능으로 실재를 인식하지.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생물적이야. 별자리의 예를 들수 있어. 하늘에 별은 무수히 많지만 우리는 특정한 별들만
을 묶어 인식하지.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계에대한 인식은, 무한에 가까운 밀도로 연속되는 물질들로부터 핵심적인 속성만을 추려내어, 개념이란 범주 하에 묶어두는것으로 생각할수 있어.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세계->지각->개념의 2단계 번역을 거치는거지.
그렇기때문에 '인식의 대상은 물리적 실재가 아닌, 대상의 속성'이라는 말을 한거야.
2-1 통속의 뇌는...사이코 과학자가 전기 신호를 주어 통속의 뇌에게 어떤 감각을 느끼게 했을 경우, 우리가 그걸 실재를 경험하고 느끼는 감각인것인지, 아니면 어떤 미친 과학자가 만드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한것인지 구분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신호든 실재경험이든) 뇌(자신)가 아닌 무엇과 관계하고 있는것은 사실이지 않냐는 말을 하기 위해 한거야.
이렇게 말하면 또 데카르트랑 구분할수가 없다 하겠지만...아무튼 그래서 통속의 뇌는 전기신호로나마 외계라 착각하고 있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는 반면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감각이 차단된 식물인간은 어떤 경험도 하지 못했으므로 자신도 인식할수 없다는거지.
다만 이걸 진짜 실제의 식물인간이 자신을 인식할수 없는것으로 생각해선 곤란해. 이건 존재하긴 하나 타존재를 느낄수 없는 존재는 자신을 인식할수 없음을 말하기 위한 설명이야. 예를들어서 돌은 이렇다 할 외부와 상호작용 하는 무언가가 없으므로 존재해도 자신을 인식할수 없을거야.
3 전제에대해 부정했으므로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지만, 내 생각의 핵심과 관계된 질문이니까 이야기해볼게. 인식은 후험적이야. 절대 선험적일수 없어. 왜냐면 인식은 발전된 상호작용이니까.
다만 여기선 선험과 후험이란 개념에대해 조금 조작적으로 정의를 할 필요가 있어. 일반적으로 선험은 경험에 우선함, 즉 경험이 필요 없음을 말하는 개념이지.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것은 실제의 생물과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야. 생물의 경험은 두가지의 뜻을 가진다고 생각할수 있어. 1. 개체선험적, 2. 종선험적
1.개체선험이란 한 개체가 경험하지 않고 가지는 능력을 말하는거야. 우리는 아마도 배우지 않고 경험하지 않아도 1+1이 2라는걸 알수 있을거야. 이경우 간단한 산술능력이나 수개념은 개체선험적인 능력이라 할수 있어.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플라톤 이데아스러운 무슨 능력인걸까? 그건 아니지. 우리가 경험하지 않고도 이런 능력을 가질수 있는건, 유전자에 그 능력이 새겨져있기 때문이지. 따라서 어떤 개체선험적인 능력은, 수많은 개체가 경험하고 진화를 통해서 유전자에 새긴 능력이야. 그렇기때문에 이것은 개체의 경험에 앞서지만, 종의 경험에 앞서진 못하지. 따라서 산술능력은
개채선험적이지만 종선험적 능력은 아니라고 할수 있어. (그리고 나는 종선험적인 능력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다시 3번 질문에대한 대답으로 돌아가보자. 인식능력은 후험적이라 했지? 여기서 말하은 후험은 종후험이야. 즉 종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능력이고 개채선험적 능력이란거지.
결론내자면 현재 인간이 가지는 인식능력이란 원시생물이 가졌던 외계와의 상호작용 능력이 발전한것이라 할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존재함이란 True와 False 로 나타낼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야. 존재함이란 관계이므로, 관계의 강함이 곧 존재의 강함이 돼. 원시적인 생물은 고등한 생물에 비해 더 미약하게 대상과 관계하고 대상을 인식할거야.
미약한 존재함. 지능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보다 더 분명하게 어떤 개념을 이해하겠지. 강한 존재함. 즉 존재함이란 진리치 0혹은 1을 가지는 논리가 아닌, 정도의 논리라는거지.
아마 원하는 답변이 되진 못할거같다. 다소 사변철학적인 분위기였던 본문 내용과 질문에 비해서 답변은 지나친 물리주의, 생물 위주였으니. 내가 본래 생각하던 내용이 대충 이런거였는데, 본문은 생물적 내용은 쏙 빼고 이야기한거였음..
이건 별로 상관 없는 내용이긴 한데, 위에서 말한 자폐에대한 생각임. 인식은 곧 관계함이고, 많은 대상에대한 인식은 많은 관계와 같지. 따라서 우리는 많은 대상을 인식할때, 그것들을 '연속의 세계'로부터 분리해내는 동시에 자신도 세계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라 말할수 있어. 타존재를 인식할수록 관계가지는 주체인 자신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게 되니까. 따라서 인식은
자아를 세계로부터 분리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것이지. 인간이 그 어떤 동물보다 자기자신을 강하게 인식하는것은 세계와 많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실제로 거울-루즈 테스트를 통과하는 동물들은 대체로 지능이 높지. 지능은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라 할수 있으므로, 지능이 강한 자아와 관련되는것도 설명이 되지.
(1)' 아하, 그렇구나. 확실히 데카르트의 주장은 감히 말하자면 유아독존적인 면모가 있어 보이긴 해. 심정적으로만 논하자면, 대상과 주체 간 상호작용을 고려한 글쓴이 의견이 매우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건 사실이야. 다만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땐 결국 골자가 유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주체가 대상을 인식한다. -> 주체만이 확실히 존재하는 단절된 관계 양상 주체가 대상을 인식한다. -> 주체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는 상호의존적 관계 양상 하나 의문이 온전히 가신 건 아니야. 데카르트처럼 대상의 존재를 단언하지 못한다면(감각의 오류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상호의존적으로 주체의 관계맺음이 가능할까?
나는 자아 역시도 정도의 문제라고 봐. 어떤 고릴라들은 루즈테스트를 통과하기도 하지만 이내 관심을 끊어버려. 이건 고릴라의 특수한 생태와 성격때문일수도 있지만, 자아가 아직 인간만큼 강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볼수도 있어. 말하자면 고릴라나 침팬지는 가정적, 허구적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강하게 인식하는 정도는 아직 아니라는거지.
(2)-1' 감각으로 자아를 인식한다... 미안, 내 식견이 좁은 탓인지, 아님 내 고정관념이 굳은 탓인지 잘 와닿지가 않네. 솔직히 나는 자아란 개념을 생물적 범주로 넣는 점이 납득하기 어렵거든. 부연해 줄 수 있다면 고맙겠어.
(2)-2' 인식 대상이 속성이라는 점은 이해가 가. 하지만 어찌 됐든, 속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감각이라는 생물적 기능이 필요하다고 했지. 한데 이 감각이란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능이고. 그렇다면 이런 불명확한 기능을 토대로 하는 우리의 자아 역시 덩달아 불완전한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말지 않을까?
달리말하면 그들이 지능이 높아진다면, 먼 후세에는 인간같은 자아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고. 인간 역시 지금 가지는 정도의 자아 이상의 자아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 여기부터는 공상이니 이쯤하겠음. 사실 내용 전부가 공상이지만.
(2)-3' 아, 맞아. 통 속의 뇌는 (그것이 허구적이라도) 외부적 경험이랄 것을 갖는 반면, 선천적 식물인간은 경험이 전무하겠지. 그런데 그렇다면, 통 속의 뇌가 갖는 그 경험이란, 신체를 갖는 우리가 접하는 외부적 경험과 동일하다는 거야? 자꾸 집요하게 묻는 점 사과할게. 하지만 만약 뇌에의 자극을 통한 경험=신체적 감각을 통한 경험으로 간주한다면,
오히려 실제적 감각의 의의가 부정되는 것 아닌가? 신체 없이도 우리가 충분히 물리적/외부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말이야.
(3)' 그렇구나. 인식은 선험적이란 말이지. 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개념과 떼어놓자니 조금 의아하긴 하네. 글쓴이가 말하는 산술능력이 곧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종합판단인데. 더욱이 남는 의문은, 글쓴이가 예시로 든 개체선험적 능력인 산술능력을 관계적인 능력으로 여기긴 어렵겠다는 거야. 산술능력을 선험적 능력으로 간주한다는 점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
(a) 하지만 1+1=2란 개념이 과거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습득된 것이란 말인가? (b) 글쓴이는 아무래도 진화론적인 전제를 많이 끌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진화 단계, 과거 개체들 간 상호작용을 통해 해당 능력이 얻어진 거라면, 과연 그 개념을 선험적이라 칭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드네...
(4) 늦은 시각이라 이리 금세 답을 달아 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어. 고깝게 여길 법도 한데 상세히 수고 들여 피드백 줘서 더더욱 고맙고. :-)
내가 무학자라 아직 자기 생각에대해서도 명확한 이해가 없고 두루뭉술한 직관 비슷한 뭔가가 있을뿐이야. 논술적으로 글쓰기를 할줄 아는것도 아니라 설명은 좀 뜬구름잡는식이야. 배운 사람이 쓴 체계적이고 정연한 글을 보다가 내 글을 보면 답답한느낌이 많이 들거.
전혀 사과할 필요 없어. 난 나쁜 의도가 없는 집요한 질문을 사과해야만 하는 행동으로 가르치는 한국사회를 혐오할정도야.
통속의 뇌가 느끼는 전기 신호가 완벽하다면 우리는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할수 없겠지 아마도...나는 우리가 통속의 뇌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수가 없어. 그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해. 통속의 뇌 논쟁이 갖는 의미는 우리의 인식과 지식이 완전무결한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실재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것에 있다
생각해. 우리가 통속의 뇌인지 아닌지 밝히는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나는 우리의 철학적 문제들이 사변적 논증을 벗어나 과학적 실증의 대상이 되는 때가 올거라 생각하고 있어. 말하자면 인간이 아직 과학적으로 관찰,계량,실증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탐구하는것이 철학의 역할이고, 충분히 기술과 지식이 발달한다면 이전엔 철학적 문제들이었던것이 과학적 문제로 변하게 될거란 말이지.
아니야, 그렇게 말할 필요는 전혀 없어! 나도 문외한이야. 그저 오지랖 넓고 이상한 데 꽂히길 잘하는 괴짜일 뿐인걸. 솔직히 글쓴이 글 읽으며 많이 배워 가. 모쪼록 달갑지 않은 댓을 마구 달아대는 건 조금 너그럽게 보아 넘겨 줬으면 해. 각자만의 생각이 있다 보니, 그걸 한 번쯤은 주고 받지 않으면 온 몸에 가시가 돋는 몹쓸 고질병이 있어서.
그렇다고 과학만능이나 자연주의를 펼치는건 아니야. 과학과 철학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이고, 이전엔 철학이 다뤘던 문제들을 나중엔 과학이 다룰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거지. 자아는 특히나 더욱 더. 생물학과 인지과학이 더 발달하면 난 자아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대상이 될거라 생각해. 핵심은 감각이고.
철학적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이하는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것에 관해선 감히 뭐라 말하진 못하겠어. 사실 난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철학이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다라고 보는 견해라서. 조심스레 예를 들어 보자면, 양자역학 이론들은 참 수리적으로는 깔끔히 증명이 되지만,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양상들을 여럿 보여 주잖아?
오죽하면 고전 물리학 개념들을 깨뜨렸을 정도이니.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과학은 이론 증명까지만 해도 족하다 생각해. 그걸 논리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건 철학의 몫으로 여겨져. 만약 그렇게 본다면, 즉 철학이 과학의 사각지대를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면, 과연 철학을 과학적으로 풀이할 수 있게 될까? 솔직히 나는 조금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야.
잠안와서 이갤저갤 돌아다니던차에 댓글 달려서 좋았어 ㅋㅋ
하지만 글쓴이 견해가 매우 흥미로운 것 역시 틀림없어. 정말 모를 일이지. 그때가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야.
나야말로 상냥한 피드백 감사해. :-D
양자역학에 대해서 말인데, 난 우리가 가지는 직관과 논리도 종경험에 의해 만들어진거라고 생각해. 며칠전에 내가 독갤에서 논쟁할때도 이 이야기를 했었으니 혹시 궁금하면 봐봐. 뭐 남에게 보라 권할 대단한 내용은 아닌데 여기서 한번 더 설명해서 말을 뒤죽박죽 하는것보단 그걸 보는게 좋을거 같아서.
그래서 난 거시세계의 물리법칙은 우리의 직관에 들어맞지만(경험했으니) 전자같은 미시세계의 물리법칙은 경험해본적이 없으므로 이해하기 어려운거라 생각해. 우리는 거시세계에 살았으므로 몇억년에 걸쳐 물질의 영속성이나 수량에대한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토대로 논리적 체계가 형성된거지. 반면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시세계의 법칙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거야
아, 그랬구나. 양자역학에 대해 잘 알진 못해서 글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ㅎㅎㅎ 추천 고마워. 한 번 읽어 보도록 할게.
그렇지! 정확해.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철학이 그 괴리감을 해소시켜 주길 바라는 거야. 물리학적 관점에선 이론 증명으로 충분히 설명을 한 셈이니까.
난 철학이,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생각해. 인간의 지적 활동을 탐구로 볼때, 그중 귀납적, 경험적, 실험적 탐구는는 과학으로, 그렇지 않은 탐구는 철학으로 보고 있어. 최초의 학문이 철학에서, 인간은 지식과 기술의 발당을 통해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을 발달시켜 과학적 방법론을 만들어 낸거야. 그렇게 자연철학에서 자연과
학이 분리되고, 또 인문학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사회과학이 분리되는것처럼. 난 근본적으로 이것들의 차이는 탐구하는 대상이 아닌 방식에 있다고 봐. 예를들어서 천문은 초 고대엔 철학의 영역이었을수도 있지만 지금은 과학의 영역이지. 심리학도 좋은 예고.
앞으로 기술과 지식이 더욱 발달하면, 인간은 과학적으로 탐구하지 못하던 대상을 과학적으로 다루게 될거야. 그렇지만 철학이 자리를 잃거나 의미를 잃는건 아니야. 난 그럴수록 오히려 철학의 영역도 커져갈거라 생각해. 학문에대한 학문, 메타탐구처럼. 과학에대한 철학 과학철학처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과학이 무엇인지,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 다뤄야
할 문제니까. 양자역학은...나는 양자역학은 커녕 고등학교 물리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야. 부끄러운데. 일종의 예시라고만 생각해.
철학이 과학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 나 역시 동의해! 당연히 학문들 간에는 어느 정도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영역 간 우열을 가리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을 테고. 글쓴이의 메타적 접근 방식에 나 역시 손들어 주고 싶어. 다만 어느 부분까지 상호 작용할 것이고, 어느 부분까지 개별적으로 성립할 것인지는 정말 미지의
이야기일 테니까... 그리고 나 역시 양자역학에 일자무식이야! 양자역학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전문가들 밖에 없겠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