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딴 윤여정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연기는 열등감에서 비롯됐다.”
개인의 열등감은 때때로 광적인 노력과 열정적인 도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늘 다룰 우리의 주인공, ‘이병주’를 대형작가로 만든 것도 열등감이었다.
그 열등감의 대상이란 문학인이 아니었으니, 4.19와 동시에 5.16을 기획해낸 근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황용주’이다.
황용주란 어떤 인간인가.
대구사범학교 제4기생으로 박정희와 동창이다. 교내 유명한 ‘맑스보이’였던 그는 선배들과 마르크스 독서모임을 진행하다 학교에서 쫓겨나버린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 중학을 다니고 와세다 대학에 진학한다.
아내와의 연애담이 굉장히 독특한데,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에게 잠복하던 사복형사들이 밀어닥친다. 불온서적을 소지한 혐의로 두 사람을 경찰서에 동행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황용주는 ‘맛떼!(기다려!)’ 소리치고는 중국집에 음식을 시켜 “전쟁도 먹어야 할 것 아니오.”라며 형사들에게 한끼를 대접한다.
그리고 형사들과 식후땡을 하며, 여자만이라도 빼낼 수 없냐고 묻는다. 그러나 여자에게도 혐의가 있어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유치장에 갇혀 조사를 받았고, 여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미래의 장인어른이 백방으로 손을 쓴 탓에 두 사람은 풀려날 수 있었다.
(이병주 <관부연락선>의 유태림-서경애 연애담이 이 두 사람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있다.)
행복한 연애와 신혼생활도 잠시, 44년 그는 학병에 징집되었다. 일본군 장교의 눈에 띈 그는 간부후보생을 거쳐 장교의 신분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패전선언이 있었다. 그는 조선 학병들의 집단탈출을 주선하고, 한국광복군으로 합류하는 것을 지휘한다.
황용주는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과 친척관계였고, 이때부터 그는 김원봉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한국으로 귀환한 이후, 황용주는 김구의 비서 장준하, 여운형의 비서 이강국과 교류하며 그들의 일정을 조율하는 일을 하였다.
당시 그의 성향대로였다면 그도 김원봉처럼 월북을 택하는 것이 당연했을 터였으나...
장인어른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2주간 처가댁에 다녀오니, 김원봉과 그의 일행들은 이미 월북을 해버린 후였다. 이로써 그는 월북을 단념하게 된다.
‘맑스가이’로의 꿈이 단념된 황용주는 고향인 밀양에서 세종 중고등학교의 교장직을 맡는다. (당시 학병 출신들은 교직으로 뛰어든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좁은 시골에서 한가로이 교장이나 맡는 건 황용주의 성미에 맞지 않았고, 그는 더 큰 세상을 찾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다.
국제신문에서 논설위원을 거쳐 주필/편집국장까지 올라간 그였으나, 곧이어 경쟁지 부산일보의 러브콜이 온다.
‘자택 마련, 월급 50만환(당시 평균 주필 월급은 30만환)’ 어마어마한 조건이었다. 황용주는 금세 환승해버린다.
국제신문 입장에선 NTR을 당해버린 것이니, 어찌 속이 안 쓰리겠는가. 국제신문은 황용주에 대항할 새로운 주필을 찾기 시작하니,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이돌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와 국제신문 주필 이병주 두 사람의 경쟁으로, 1950년대의 부산은 지방언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무렵, 박정희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맡게 되어 부산으로 내려오니, 박정희-황용주-이병주 술친구 트리오가 결성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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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인가? 이런거 어캐 다알고있는거지
이번 편은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를 참고한 것인데, 황용주의 개인 일기, <박정희 기념 사업회 녹취록>, 조갑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등이 자료가 되었음.
포식자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