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베까는 다시 흙을 먹기 시작했다. 고약한 흙 맛이 오히려 흙을 먹고 싶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이 될 거라 믿고서 처음에는 거의 호기심에서 흙을 먹었었다. 실제로 입 속에 넣은
흙 맛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레베까는 증대해 가는 갈망을 이기지 못한 채 계속해서 흙을 먹어댔으며,
차츰차츰 옛 입맛과, 흙이라는 원생 광물에 대한 기호와, 흙에 함유된 기초 영양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개운한 만족감을 회복했다.
/ "아우렐리아노, 넌 훌륭한 박쥐가 되기엔 너무 심술궂구나."
-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구호
/ "일은 어떻죠?" 글은, 시는? 아르투어? 그건 어때요?"
"중요하지 않아요."
"왜죠?"
"시간 낭비에요. 떠벌릴 이유가 없어요."
"당신 작품이 책으로 나오지 않는 게 속상하지 않나요?"
"속상하지 않아요."
"작품이 훌륭하지 않은 건? 그건 속상하지 않나요?"
아르투어는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 에프는 다시 등장하며, 한 인간에 대한 해부가 서너 쪽에 걸쳐 진행된다. 재능은 있지만 용기는 없고,
단호하지 못하며, 비열함의 경계선에 닿을 만큼 자기중심적이며,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끼고,
사랑에 금방 싫증을 내고, 뭔가 진지하게 관여할 능력이 없고, 예술도 빈둥거림을 위한 변명으로만 이용하고,
남에겐 관심조차 없으며, 책임질 능력이 없고, 자신의 실패를 마주하기에는 너무 비겁하며, 약하고, 불성실하고,
불필요하며, 공허한 사고의 유희와 실체 없는 사이비 예술에만 재능을 보이고, 모든 불쾌한 상황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오는 데 능한 사람이 본연의 자아에 대한 권태 때문에 마침내 어느 누구도 자아가 없으며 각각의 나는
속임수라고 주장해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세 번째 부분 역시 보이는 것처럼 명쾌하지는 않다. 이런 자기혐오가 정말 사실일까? 앞선 설명에 따르면
나란 존재는 없으며, 모든 양심 탐구도 의미가 없다. 어떤 부분이 어떤 부분을 상쇄하는가? 작가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
- <에프>, 다니엘 켈만, 임정희
/ 나는 옛날부터 오직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 소설을 썼고, 그에 대해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질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 집요한 역사의 기본형입니다. 극복과 성장은 개인의 혼의 기록이며,
희망과 가능성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 유이치는 신난다는 듯 냉장고에서 그레이프 후르츠를 꺼내고, 주서기를 상자에서 꺼냈다. 나는 한밤의 부엌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만들어지는 두 사람 분의 주스 소리를 들으며 라면을 끓였다. 굉장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별 일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기적 같기도 하고,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튼 나는 말로 표현하자면
사라져버리는 담담한 감동을 가슴에 간직한다. 시간은 많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밤과 아침,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이런 때가 꿈이 될지도 모르니까.
- <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김난주
/ 그때에 …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그러자 이번엔 그게 기쁘고 막막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야겠다 이왕에 여기까지 살았으니 끝내 살아보자는 뚜렷한 맴이 들었어 … 그 확고하고도 뚜렷한 맴을
먹게 된 것이 부끄럼 덕이었으니 그것이 나를 살렸지 그러니까 그것이 보자 지금 내 나이가 하나 둘 서이 너이 …
하니 거의 백 년의 일이로구나 …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해 그것 한 가지 내가 그 맴을.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 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
/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 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 d에게는 박조배의 배낭 같은 것이 필요없었다.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 … 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그것이 따로 있다면, 이렇게 끝날 조짐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이어지고 있다.
조짐도 무엇도 없이 이것은 이렇게 이어진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d는 의아했다. 망한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 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 <웃는 남자>, 황정은
미와가 촐랑촐랑 공양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멈칫 놀라 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5층짜리 포근한 떡 뒤로 주승과 수봉과
좌자와 영차가 차려 자세로 나란히 서 있었던 것.
사람은 넷 뿐이었지만 도열이라는 말에 어울릴 광경이었다. 워낙 큰 눈을 미와는 더 크게 뜨고 꼼짝없이 멈추어 있었다.
먹음직스런 만찬이 차려진 긴 자작나무 식탁을 사이에 두고 4대 1로 마주하는 형국. 미와는 심복들이 호위하는 원수의
은밀한 처소에 불현듯 홀로 내습한 복수의 화신? 그런 씬 같았다. 네 사람의 표정에 웃음기라곤 없었으니까.
미와를 노려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니라면, 그냥 뻔한 표정이었달까, 떡에는 환영이라고 써놓고 따뜻한 김도 모락모락 나는데.
긴장과 적대가 아닌 엄숙과 숙연의 분위기였던 것인데 서툴렀을 뿐이다. 엄숙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미와는
얼떨떨 놀랐을 뿐이고, 아닌 게 아니라 공양간의 분위기는 코미디일 뿐이었는데 여전히 연기에 서툰 네 명과
얼떨떨한 한 명 때문에 어정쩡한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장난이나 허투가 아닌 진실한 배려와 관심,
네 사람의 뜻은 그것이었을텐데 진지함에 서툴렀던 나머지 그만 긴장과 적대 같아지고 말았다.
미와는 그걸 알 리 없었고.
- <풍경소리>, 구효서
/ 그의 존재란 무수하게 많은 황색의 얼굴들 가운데 섞인 하나의 황색 얼굴, 때로는 군중과 소음과
배고픔의 바다 저 위로 떠오를 뿐인 어떤 얼굴 같은 것이어서 사실 저 수많은 인간들의 물결 속에서
감히 나야! 하고 나서서 말할 수 있기에는 분간조차 잘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구름 떼처럼 많은 인부들 중의 한 인부로 부두에서 일하는 한 알갱이의 인간, 먼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그에게 이것이 바로 내 것이다 하고 기억해낼 만한 것이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아마도 그의 이름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그 이름마저도 부두의 흔한 하역창고에서 허공으로 날아가다가 흩어지는 그런 것이었다. 오직 저녁이면 기어들어가서
잠자는 그 컴컴한 고미다락에서나 그는 겨우 한데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의 다중성에서 잠시 헤어나는 것이었다.
/ 만약에 그 중국인이 기이하게도 내 기억 속에 한사코 되살아나서 무엇보다 그의 존재를 상상해낸 것은
바로 나뿐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내게 상기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그냥 그렇게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한 인물이 그 무슨 연옥에서인가 살겠다고 불러대는 저 소리는 한 작가의 가슴에 얼마나 강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인가
-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가브리엘 루아, 김화영
/ 캐나다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저 곧고 쭉 뻗은 좁은 도로들을 알고 있는가? 평야를 거대한 체스판으로 만드는 그 도로들 위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하늘은 오래전부터 어떤 말을 움직여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만 같다.
/ 그때 엄마가 들뜬 마음이 가시지 않은 듯 내 팔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크리스틴, 네가 이 멋진 작은 도로를 찾은 게 우연이니?"
"그러니까 젊은이의 경솔함도 다 쓸 데가 있단 말이죠!" 나는 엄마의 질문을 우스갯소리처럼 받아쳤다.
하지만 엄마는 정말로 근심스러운 눈치였다.
"그렇다면 내년에 삼촌네 올 때 넌 이 도로를 다시 찾지 못할 테고, 어쩌면 결코 못 찾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러다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도로가 있단다, 크리스틴."
"그래서 날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나는 엄마를 살짝 놀리는 듯한 말투로 되받았다. "엄지왕자처럼
길에다 빵가루라도 솔솔 뿌리란 얘기에요?"
그 순간, 언덕들이 살며시 길을 터 주었다. 연약한 전나무들 사이에 난 틈 속에서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퉁불퉁한 땅 위아래로 매달린 너덧 채의 집들이 산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 집들 중 한 채 위로 '우체국'이라고 쓴
빨간 간판이 반짝였다. (…)
"'알타몬트'로구나." 엄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엄마의 젊고 흔들리는 영혼은 더 이상 교차로도 힘겨운 출발점도 없는 고장으로 그렇게 떠나갔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는 아직도 길들이 있겠지만, 그 길들은 모두 알타몬트를 지나간다.
- <알타몬트를 지나는 길>, 가브리엘 루아, 이소영
/ 정부의 힘 있는 사람들이나 식민청 고관들이 식민지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면 아빠는 그들을 늘
던리로 데려갔다. 던리는 아빠가 확실한 눈도장을 받고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철도회사들은
사진사를 급파하여 로스트 리버의 경관을 찍어갔다. 그리고 캐나다태평양철도회사는 이민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위해 던리의 이모저모를 꽤 자세하게 찍어서 폴란드니 로마니아니 거의 온 세상
곳곳으로 보냈다. 그 이유는 이 회사가 이민자 수송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빠는 유혹적은 포스터 한 장만 보고 캐나다로 덜컥 이민을 왔다는 딱한 체코 사람도 만나봤다.
강, 금빛 밀밭,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집들과 똑같은" 가옥들… 그런데 그 체코 사람은 지금 광산에서 일한다고 했단다.
아녜스 언니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자 왜 아빠가 거짓을, 특히 누락으로 빚어낸 거짓을 그토록 가증스러워했는지 납득이 갔다.
왜 엄마가 사실을 미화하면 그토록 질색하는지도 알 만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고……
/ 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책을 읽는 아이였고, 이제 나 자신이 소중히 여김 받는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다.
익명의 존재, 여자, 아이, 친구의 손에서 넘어가는 몇 장의 삶이 되어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그들을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 <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이세진
/ 그 일로 아이를 나무라는 게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가느다란 구멍 속에 봉투를 밀어 넣으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게 밀어 넣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건 무슨 뜻일까? 우리도 그렇게 했던가?
만약에 우리가 봉투를 구멍 속에 밀어 넣으면서 아주 작게라도 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면 우리는 지금 그것을 후회한다
- <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나동하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다정하게 내 어깨를 움켜쥐더니,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만일 내가 그와 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자랐다면 나는 지금 좀 더 몸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을 텐데.
이런 경우에도 팔꿈치로 슬쩍 치는 것으로 대응을 했을 텐데. 나의 몸무게의 가장 작은 부분만 던지는 방법으로.
그를 안심시켰을 텐데. ―나는 진심으로 그것을 원했다―필요한 제안을 했을 텐데.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혀와 심장과 마음이 담긴 모든 범주의 침묵을 기념한다.
나는 현장의 언어학자이다. 당신 역시 그 곤혹스럽고 전문적인 위력을 알지 모르겠다. 그 위력은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단단한 표현을 찾아낸다. 지금 그 얼굴을 보라. 당신이 보는 것은 언젠가는 모두
희미해질 것이다. 너의 싸늘한 냉기만 남기고.
- <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정영목
아따 졸라 많이 보네 ㅋㅋㅋ 추천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