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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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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책이 있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봐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가도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언젠가 읽게 되는 날이 오겠지, 하는 식으로 읽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문득 도서관이나 서점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제목이 눈에 밟히고, 여태 이 책에 대해 그런 식으로 넘겼던 옛 일들이 순식간에 환기되면서 이번에야말로 읽어봐야겠다, 하는 포부를 갖고 들고 오는 책이. <만엔>이 딱 그랬다.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예전에도 읽어봤고 글을 잘 쓴다고 생각은 했지만, 당시에는 확실히 좀 머리 아픈 주제에만 계속 천착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아마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었었을 텐데, 어렴풋이 미와 매체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하게 이야기를 꼬아가며 나아가던 글이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찾지는 않았던 탓이다.


다만 <만엔>을 읽고 나자, 이런 식으로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계속 미뤄졌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내게는 <만엔>이 그리 와닿지 않았을 테다. 인생 경험이 얕다, 하는 문제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런 말에 대해선 아직 그리 공감이 가지 않아 넘기자.(공감이 간다면 오히려 이미 얕지 않다는 반증 아닐까?) 요는 <만엔>이 과거와 현재에서 계속 교차시키는 어떠한 사상, 민중 운동의 열기와 그에 대한 냉소에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만 <만엔>이 제시하는 화해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단 점이다.


화자의 가족은 전쟁 전후로 피붙이의 죽음을 자주 겪었고, 개중 S 형의 죽음이 화자와 그 동생 다카시에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달되었다. 냉소적인 화자는 실제 경험과 문헌을 통해 그 죽음이 고장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 속죄양으로서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다카시는 이를 일종의 영웅적 최후로 해석하여 그 죽음을 불러온 행동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시각의 차이는 대조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데, 화자야 이 죽음의 의미에서 따로 뭔가 행동을 할 것이 없기에 죽음을 그저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다카시는 이 S 형의 영웅적 죽음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자신의 조상,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이 영웅적 기상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


비록 화자가 스스로에게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그 자신이 꿈꾸는 뿌리인 "풀의 집"이 현실성 떨어지는 다소 몽상적인 물건임을 암시하지만, 다카시에게 보이는 태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온화하다. 해외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다카시의 주도적 행동에 휩쓸려 고향으로 돌아온 화자는 그 고향에서 영 표현하기 힘든 낯섦을 느끼고 방황하다,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다카시와 고향에 선을 긋고 다카시가 이 고향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다카시가 찾아낸 자신의 뿌리이자 마을의 원동력으로서 부활하고자 한 만엔 원년의 봉기와 염불춤 전통의 소재들의 근거가 허황되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보이는 식으로 말이다.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이라는 조상과 만엔 원년의 봉기의 기억을 마을에 되살리고자 한다. 의고적인 풍습 재현이 일어나고, 눈 속에서 멍한 의식으로 집단적 파괴가 일어나고, 공통적인 적을 짚어 이 대상에게 모두의 증오를 쏟아부으며 기묘한 화합을 이뤄낸다. 허나 화자는 다카시가 설파하는 이 기억들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는 이미 옛 기록들을 파헤치다, 이 봉기의 주동자께서 다른 봉기 참가자들이 죽게 내버려둔 채 미국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이 봉기와는 전혀 무관한 평화로운 시민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카시가 증조부의 동생의 탈을 깊게 눌러 쓸수록, 다카시를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민중 운동이 일어나던 마을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하게 그려진다. 술에 취한 채 아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심한 싸움을 아무 말 없이 이어나가는 어른들, 슈퍼마켓 앞에서 줄을 서서 하나씩 약탈을 해가는 마을 사람들, 감금해놨던 슈퍼마켓 지배인에게 야유를 하며 눈덩이를 던져대던 아이들. 화자가 과거에 한쪽 눈을 잃게 만든 영문 모를 투척에 대한 기억과 이들이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상대에게 잔혹한 집단으로 해석된다. 화자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여기에서의 일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끔 나가고자 할 뿐이다.


허나 이 숨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다카시는 봉기가 진정으로 성공할 듯한 순간에, 자신을 파렴치한 범죄자로 꾸며낼 수 있을 법한 사고 앞에서 실제로 이를 꾸며내고 그 위악을 화자에게 들이밀며 자신이 극형으로 처형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자가 다카시에게 향한 냉소는 훨씬 더 날카로워지며, 그가 이런 행동을 하려드는 것은 어린 시절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늘 뭔가 더 큰 처벌, 더 극적인 처벌을 원할 뿐이라며, 애처로운 연기를 비웃는다.


물론 다카시는 스스로 그럴 만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화자의 친구가 괴상한 죽음으로 무언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었듯, 다카시 역시 끔찍한 죄책감 속에서 이 한 순간, 고백의 순간으로 일종의 극적인 전환점이 찾아오길 기대했던 것 같다. 그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화자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확실히, 소설의 중반부 유사 봉기 때부터 타오르던 열기가 팍, 꺼져버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힘 빠진 다카시는 몇 번이고, 그냥 연습이라는 둥 총을 아무 곳에나 쏘다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자살한다.


여기에서 끝났더라도 그렇겠거니 싶지만, 이 의미는 결말에서 한 번 뒤집히며 전혀 다른 결론을 유도한다. 공사를 위해 집을 해체하던 과정에서 화자는 증조부의 동생이 평생 동안 숨어 살던 지하실을 발견한다. 그 순간, 화자는 비로소 다카시와 증조부의 동생이 진정으로 닮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그 역시 평생 동안 이어지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해야 했던 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얄궂게도 고향 마을은 이 유사 봉기 이후로 실제로 바뀌어,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집단이 되었다. 다카시의 죽음은 S 형의 죽음을 재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화자의 마음 속에서 화해가 이뤄진다.


예전부터 이런 열띤 사회 운동과 그에 대한 냉소를 접할 일이 많았다. <바더 마인호프> 같은 영화가 좋은 예시리라. <만엔>의 경우 화자가 초반부에서부터 폭력에 대한 냉소를 계속 표현하고, 이것이 사회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줄곧 유지되기에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뒷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다.


이 이상의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만한 책이지만, 그러려면 내가 냉전기와 현재 신냉전기에 대해 가진 열띤 관심과 이로부터 환기된 수많은 기억들을 전부 끌어내야 할 테다. 언젠가 생각을 좀 더 갈무리해서 활자로 옮겨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P. S. 지인으로부터 오에 겐자부로의 <홍수는 나의 영혼에 이르러>를 추천받았으니 다음으로 읽게 된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아마 이것이 되지 않을까. 비록 한참 예전에 절판된 책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