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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문학인도 아닌 황용주의 인생을 이토록 부단히 다뤄왔는가. 분명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 연재글인데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 모든 게 대형작가 이병주의 근원을 탐색하기 위한 기본작업에 불과하다.

이병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학병에 끌려간 경력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은 지난 편(이병주vs선우휘)에서 다루었다.

그런데 그 콤플렉스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일본에 징집되었다는 사실 그 이상으로, 이병주는 황용주란 인간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황용주-되기’야말로, 이병주 일생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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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관부연락선>의 작가소개 칸에는 한가지 위조된 정보가 적혀있다. 이병주 스스로를 ‘와세다 대학’ 출신이라 밝히는 게 그것.

사실 이병주는 메이지 대학을 나왔으며, ‘와세다 대학’을 나온 것은 황용주였다.

김윤식 평론가는 <관부연락선>의 실제 주인공이 황용주임을 내세우려는 의도적인 계산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황용주를 향한 질시와 부러움에서 기인한 행동이라 봐야 옳을 듯하다.



이 열등감은 어디서 온 것인가.

황용주의 빈자리, 부산일보 주필 자리에 이병주가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열등감은 시작된 후였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이병주는 황용주의 대체재였던 것. 나이는 3살 차이지만, 두 사람의 경력은 그 이상으로 벌어져 있었다.

(학병 대표였던 황용주와 학병의 일원인 이병주, 교장 출신 황용주와 교사 출신 이병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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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의 관계도 한몫했다. 어느 날, 박정희는 두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주필(황용주)의 논단은 명쾌한데 이주필(이병주)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해요. 아마 이 주필은 정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

- 조갑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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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이병주는 황용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

5.16 직후 박정희가 감옥에 갇힌 황용주는 바로 빼주었으나, 이병주는 빼주지 않았던 것.

최측근과 단순한 술친구의 차이. 그로 인해 2년 7개월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으니, 이병주에겐 뼈아픈 상처였다.


이병주의 '황용주-되기'를 위한 노력으로 다음 4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메이지 대학 문과를 나온 이병주가 명문 와세다 대학을 나온 황용주로 둔갑하기. 그것이 <관부연락선>이라는 것.

둘째, 일본군 간부후보생을 거쳐 장교되기. 군사재판소의 기록에 의하면 황용주가 먼저 일본군 육군 소위가 되었고, 그 다음에 이병주가 일본군 육군 소위가 된다.

셋째, 논설위원 되기. 부산대에서 불어를 가르치던 황용주가 <부산일보> 주필/편집국장이 되었는데, 해인대에서 불어, 영어를 가르치던 이병주 역시 <국제신문> 주필/편집국장이 되었던 것.

넷째, 박정희와 친해지기. 그러나 황용주는 최측근이고, 이병주는 술친구에 불과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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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64년 <세대> 필화 사건으로 황용주가 나가리 되고, 이듬해 이병주는 <세대>에 황용주를 모델로 한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실어 대박을 친다. 인생역전의 기회, 황용주를 넘어설 기회가 드디어 이병주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병주는 황용주와 같지 않다’ 이 도식이야말로, 이병주 문학세계의 원동력이었다.

황용주를 향한 열등감,

거기에 더해 감옥생활 이후 더 이상 언론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자괴감은 문학을 향한 압도적인 열정으로 이어졌다.

마흔이 넘어 등단한 이병주가 80여권의 작품을 써낼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물론 능숙한 저널리스트였기에 속기가 가능했던 덕도 있지만.)

‘통일론’을 쓰다 나가리 되어버린 황용주를 넘어서려는 노력의 결실이 다름아닌 한국 최초의 빨치산 소설 <지리산>인 것.

그러나 ‘논픽션’인 사설과 달리, ‘픽션’인 <지리산>으론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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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병주의 손에서 박정희 일당을 규탄하는 훌륭한 작품이 나오길 고대하는 마음이었어.

그런데 그러했던 이병주가 75년의 사상전향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접근해요.

유신헌법이 선포되던 날 박정희의 자서전을 쓰겠다고 말하더라고.

이병주에 대한 나의 우정과 기대가 컸던 만큼, 그의 입에서 이 고백을 들은 순간 큰 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어."

- 리영희, <대화> 391p


리영희의 충격은 이병주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음에서 인한다.

이병주에게 황용주는 삶의 모델이고, 표준이었던 것. 그를 닮고 싶어했고, 그러나 그가 될 수 없다는 자기인식이 이병주 문학의 본체인 것.

이병주가 전두환과 친하게 지낸 것도 이 때문이라 볼 수 있겠다. 박정희에게 지적 스승 황용주가 있었듯이, 전두환에겐 자기가 있다는 자부심.

한 출판사 대표의 증언대로라면, ‘이병주는 권력에 굴종한 게 아니다. 작가로서 자존심을 갖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가르쳤다.’

물론 이런 이병주의 시도가 얼마나 진실성 있고 효과 있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다. 이병주는 소설가로 대성한 이후에도 황용주를 향한 동경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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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훈훈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이병주가 망자가 된 1992년, 황용주는 여주의 양지바른 묘지를 주선해준다.

1961년 자기만 혼자 감옥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황용주는 항상 이병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세 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친구처럼 서로 편하게 부를 수 있던 것은 그런 죄의식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한때는 전쟁터에서 동거동락한 동지였고,

한때는 언론계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두 사람,

또 한때는 감옥에 갇혀 서로 사이가 갈라지기도 하였으나.

이젠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그들.

<산하>의 명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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