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c62f52b489dee

스포 있음 수준이 아니라 그냥 전체 스포임 관심 있었으면 보지 마셈








다시 한 번 <솔라리스>로 돌아온 기분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참 다양한 방식으로 SF가 사람들에게 보장하던 무한 성장을 통한 승리의 불확실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적호>는 <솔라리스>와 비슷하지만, 또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생태계를 통해 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사실 <무적호>는 <솔라리스>만큼 철학적 주장이 강하지는 않다.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가상 견문록에 가깝지 않을까.


<무적호>는 미지의 행성에서 실종된 우주선을 찾고 그 실종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무적호의 선원들의 이야기다. 얼마 안 가, 이들은 선원들이 전멸한 우주선의 잔해와 이들을 전멸시킨 무언가를 발견한다. 소위 "구름"이라고 일컫는 그것은 자그마한 Y자 모양의 금속 무생명 곤충들의 집합체로, 개별 개체들은 거의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지만 그 집단으로 뭉쳐 있을 때는 일종의 유사 뇌와 같은 작동을 하며, 자극을 피하거나 자극에 대응하여 공격을 하곤 한다. 문제는 이 공격이 어떤 방식이느냐인데, <무적호>의 초반부는 그 방식을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한다. 수상할 정도로 자기장에 민감한 어류라든가, 자기화된 금속들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구름"의 공격 방식은 "구름"이 이 행성의 생존 경쟁에서 승리하게 된 경로를 추측하며 구체화된다. 무적호의 학자들이 추측하기를, 근처의 다른 휴머노이드 문명에서 보낸 식민지 개척을 위한 오토마톤(자동 기계)들이 정작 그 문명이 급작스럽게 멸망하고 난 뒤 통제를 받지 못해 자체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며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던 거대한 오토마톤들이 어떻게든 자기들을 수리하고 새로 만들기 위해 계속 번성하는 종들과 훨씬 단순한 형태로 재생산되도록 새롭게 만들어진 종들. 여기에 더해 행성의 기존 동물들까지 총 세 세력이 에너지가 희박한 이 행성에서 경쟁을 시작한다.


저 단순한 형태의 무생물 종들이 보건대, 동물들과 거대 오토마톤들은 하나의 큰 공통 약점이 있다.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현대의 의식의 정의가 일종의 동작 원리 집합체를 포괄하기는 하더라도) 무의식적인 기계에 가까운 "구름"은 곧 그 몸체를 구성하는 전류를 사용해 동물과 오토마톤의 뇌를 공격하기로 했다. 엄청난 세기의 자기장을 걸어 뇌를 말 그대로 리셋시켜버리는 것이다. 공격하고자 하는 뇌의 종류에 따라 자기장의 주파수를 다르게 하고, 그것이 유기체적인 의미로 기록되어 있었든, 무기체적인 의미로 기록되어 있었든, 여태 기록된 것들을 싹 지워버린다. 기존 우주선의 선원들 역시 동일한 공격을 당해 백치가 되어 하나씩 죽어나갔던 것이다.


<솔라리스>와는 다르게, <무적호>는 이 "구름"을 끝까지 무의식적인, 자연물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하는 데에 만족한다. 복수를 위해 "구름"을 멸절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해일로 사람을 잃으면 바다에 채찍질을 할 거냐는 듯한 생각을 하는 식으로. <솔라리스>의 "바다"가 하나의 거대한 초의식체, 인간의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더 초월적인 의식을 가진 것처럼 암시되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따지자면, 피터 와츠의 <블라인드 사이트>가 이 소설과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물론 <블라인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긴 했다. 의식을 갖도록 진화한 것이 오히려 패배 조건이 된다, 는 것 마냥.


이야기 흐름 자체는 상당히 단순하고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사실 <솔라리스>보다 인기를 끌기엔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