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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미간이 대단하다)



결국 소설은 유희여야 한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그렇다. 일차원적인 독자에 한정되는 말은 아니고 작가의 입장에서 동시에 이야기되어야 하는 문장이다. 직업으로서의 작가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작업이 (다소 매저키즘이 뒤섞인) 개인의 유희 충족임을 독자에게 예감시키는 능력을 지닌 작가들을 나는 재밌다고 느낀다. 지면을 단순한 실험실이 아니라 놀이터로 썼던 사람들. 그래서 쉽게 빠질 수 있는 전위에 매몰되지 않고 긴 생명력을 얻은 작품들. 오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편하니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이쯤에서 들고 오자. 이 용어의 이미지와 앞서 말한 놀이터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현실 세계에 대한 작가 입맛대로의 칼질, 덩어리 붙이기, 미적 경이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의 첫머리에는 보르헤스가 있다.

 

[드러누운 밤]은 코르타사르의 유일한 단독 번역본이다. 보르헤스와 같은 아르헨티나 인, 라틴 아메리카 붐 문학의 대표주자이고,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 목록에서 늘 언급되며, 무엇보다 재밌는 이야기꾼. 3년 전 볼라뇨를 탐독하던 나는 관련 정보글을 읽던 도중 보르헤스와 항상 같이 언급되던 코르타사르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했으며 또 며칠이 지나가기 전에 홀린 듯이 다 읽어버렸다. 책을 다시 잡은 지금은 페이지 줄어드는 게 아쉬워 적당한 날에 단편 하나씩 읽어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것엔 의무감이 없다. [드러누운 밤]은 수동적인 활자 읽기에 머물기보단 목적지가 불분명한 수많은 길을 선택 해야하는 나름의 지적 참여를 요구하지만 우선 근본적으로 즐겁고 재밌는 이야기 책이다.


아주 지적인 괴담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다소 길이가 있는 중편 소설을 제외한, 임팩트 있는 단편들은 급식 시절 네이버 블로그에서 읽던 짧은 레딧발 괴담 전개의 원형 같이 느껴진다. 소설집의 첫 단편 [점거당한 집]은 그 전형이다. “나는 이러이러해서 이 집에서 살게되었고 누구누구랑 어떻게 해서 살고 있으며...”. 그 뿐만이 아니라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다 마지막엔 현재 시점에서의 반전이 드러나는 [먼 곳의 여자], 편지에서 시작돼 파운드 푸티지로 끝나는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 이토 준지의 [기나긴 밤]을 떠올리게 하는 [드러누운 밤]. 그리고 픽션과 독자의 경계를 말 그대로 허물어버리는 메타-픽션. 조금은 전문적인 인식론적 논의를 요구하는 보르헤스보다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충격과 전복.

 

반전과 구조 자체는 현대 시점에서 많이 답습된 종류지만 이런 장르의 핵심은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방식의 유려함이다. 웃긴 표현이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욱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환상을 더욱 있을 법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문체라는 단단한 기둥이 필요하다. 미스터리한 기괴 물체가 갑자기 튀어나온다면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 뿐이다. 반면, 코르타사르의 소설에선 아주 작은 트리거로 인해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원래 있던 공간에서 흘러 나와 작품 전체를, 그리고 독자의 현실을 질릴 정도로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한다. 디시에서도 꽤나 유행을 끌었던 판판야의 만화를 떠올려보자. 발붙이고 있는 현실의 이편으로 넘어가는 모험. 추가로 이방인의 눈에는 신비주의적 색채, 더 나아가 마술적으로 보이는 라틴 아메리카 자문화의 요소를 환상의 양분으로 적극 활용하고, 거기에 이야기꾼 특유의 견고한 문체가 합쳐지면 코르타사르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

 

판판야도 그렇고 이런 환상문학을 사랑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세계의 견고함을 부정하는 인식이다. 세상에 확신할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인식. 그럼에도 모든 것은 의미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확신할 게 없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작품을 써서 안될 건 없지 않을까? 라며 독자에게 행하는 장난질. 그런 과정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가의 즐거움. 정말 이런 작품이라면 평생을 읽을 수 있다.

 

"조금만 주목하고 조금만 느끼고 조금만 침묵하면 수많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문에도 침대에도 구멍이 나 있고, 손도 신문도 시간도 공기도 그러한데, 모든 것에 구멍이 가득하고, 모든 것이 스펀지 같으며, 모든 게 스스로를 걸러내는 여과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