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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자신만의 나라 - 자유주의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 by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유주의가 위험에 처했다.자유 사회의 기반은 다름에 대한 관용,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법의 지배인데 이 모든 것들이 민주주의의 침체를 겪음에 따라 위협에 처했다.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는 지난 16년간 매년 떨어졌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독재국가의 부상, 헝가리와 터키 같은 자유로웠던 나라의 후퇴, 인도와 미국과 같은 자유국가의 후퇴에서 자유주의의 쇠퇴가 드러난다.
각각의 이러한 경우들에서, 국가주의가 비자유주의의 주된 동력이었다. 비자유 지도자들, 당들, 그들의 동맹들은 애국적 수사를 이용해 자기 사회에서 더 큰 통제력을 얻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들을 손이 안 닿는 엘리트, 무기력한 사해동포주의자, 세계화론자로 부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기 나라의 진실된 대표자이자 수호자라고 주장한다. 때때로, 비자유 정치인들은 자유주의적 경쟁자들을 비효과적이거나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많은 경우, 한편,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 라이벌들을 단순히 정적이 아니라 좀 더 심각한 것으로 주장한다: 민중의 적으로 말이다.
자유주의의 천성은 그것을 이런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는 관용이다: 국가는 신념과 정체성, 다른 도그마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17세기에 주된 이념으로 부상한 이후로, 자유주의는 정치의 목표를 낮춰 특정 종교, 도덕적 지향, 문화적 전통에서 말하는 “좋은 삶”을 노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동의할 수 없을 때는 말이다. 이러한 불가지론적 속성은 영적 진공을 만들고, 개인들은 각자의 길을 가며 공동체 의식을 조금밖에 느끼지 못한다. 자유주의 정치질서는 관용, 타협, 신중함과 같은 공통의 가치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는 잘 짜여진 종교적, 민족적 공동체가 주는 것과 같은 감정적 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실로, 자유주의 사회는 목적없이 물질적 만족만을 추종하는 자들을 권장한다.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매력은 지난 몇세기간 유지된 것과 같다: 다원적 사회에서 다양성을 잘 관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유지할 수 있는 다양성엔 한계가 있다. 만약 충분한 수의 사람이 자유주의의 원칙 자체를 스스로 거부하고 타인의 기본적 권리를 제한하려 한다면, 만약 자기 길을 가기 위해 폭력을 쓰려 한다면, 자유주의 혼자서는 정치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다양한 사회들이 자유주의 원칙을 떠나고 그들의 국가 정체성을 인종, 민족, 종교, 또는 다른 버전의 좋은 삶에 대한 비전에 기반하려 한다면, 그것들은 피투성이의 충돌을 불러온다. 이런 나라들로 가득 찬 세계는 더 분열적이고, 떠들썩할 것이며, 폭력적일 것이다.
그것이 왜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라는 개념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들은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유주의의 보편성이 그것을 국가와 호환되지 않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 정체성은 물렁물렁하고, 자유주의적 열망을 반영할 수 있으며 공동체 의식과 목표의식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국가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한 증거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이 러시아와 구별되지 않으며 쳐들어가면 바로 폭삭 무너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에 열심히 맞서 싸우고 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우크라이나를 사랑하며 부패한 독재자 아래에서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감함으로, 그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과 자유주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주의의 영적 진공
자유주의 국가들은 긍정적인 국가 정체성을 시민들에게 제시하기 어려워한다. 자유주의 뒤에 있는 이론은 공동체들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을 긋고 누가 안에 있고 밖에 있는지 말하길 어려워한다. 그것은 자유주의 이론이 보편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선언에서 나타나듯,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갖는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인종, 성, 언어, 종교, 정치적 신념, 국적, 빈부, 탄생지와 관계없이 권리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 어디서 인권침해가 일어나건 이론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주의자들의 국가에 대한 사랑을 싫어하고 자신들을 “세계시민”으로 생각한다.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국가체계가 존재하는 현실과 알맞지 않아 보인다. 자유주의 이론에선 국가 간 국경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 카탈루냐 퀘벡 스코틀랜드 같은 분리주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지침이 없다.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은 자유주의자들의 보편성과 국가주의의 더 좁은 주장을 강력하게 대비시켰다.
국가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국가 공동체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그것을 먼 나라의 동료 시민들을 챙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대체했다고 불평한다. 19세기 국가주의자들은 정체성을 생물학에 기반했고 국가 공동체는 공통의 조상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이것은 현재의 국가주의자들에게도 보이는 특징이다. 헝가리의 오르반은 헝가리의 국가 정체성을 마자르 민족성에서 찾았다. 인도의 모디는 힌두 민족주의에서 국가 정체성을 찾는다. 이스라엘의 학자 요람 하조니는 21세기 민족국가주의를 공통의 음식, 휴일, 언어, 선호에서 찾았다.
미국의 보수 가톨릭 정치학자인 패트릭 드닌은 자유주의는 그 이전에 있던 모든 문화를 파괴한 반문화이며 개인의 삶 모든 곳을 통제하려 드는 국가의 힘을 강화했다고 주장했다. 명백히, 드닌과 다른 보수 학자들은 경제적 신자유주의자들과 헤어졌고 시장 자본주의를 가족, 공동체, 전통의 가치를 갉아먹는 것으로 비난했다. 그 결과, 20세기 좌익과 우익을 갈라놓았던 경제적 이데올로기 지도는 더이상 맞지 않는다. 우파가 국가 권력을 이용해 사회생활과 경제를 규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즉, 자유주의는 공동체가 유대를 가질만한 강력한 공통의 도덕적 핵심이 없다는 것은 유효하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속성 중 하나다. 보수주의자들을 위한 질문은 시계를 되돌려 더 강력한 도덕적 규칙을 다시 가져올 수 있냐는 점이다. 오늘날의 미국에 기독교 윤리를 다시 가져올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미국은 16세기 미국에 비해 종교적으로 훨씬 다양하다.
-국가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세계 각지의 비자유주의 세력은 국가주의를 선거용 무기로 게속해서 쓸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수사를 징고이즘적이고 미개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들은 ‘국가’를 적들의 손에 넘겨서는 안된다. 자유주의와 국가주의는 재결합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목표는 국가로 쪼개진 세계체제에 완전히 부합한다. 모든 국가는 내부적, 외부적 안정을 위해 힘을 필요로 한다. 자유로운 사회는 이것을 강력하지만 법의 제한을 받는 국가를 만들어 해낸다. 국가의 힘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일부 제한한 시민들의 동의를 통해 생긴다. 국가의 힘을 법에 의해 모두가 같은 통치를 받는 것으로 정당화되며, 특히 자유민주주의일 경우 대중 선거를 통해 정당화된다.
막스 베버가 말한대로 국가가 자기 영토 내에서 힘을 독점하지 못한다면 자유 권리는 무의미하다. 국가의 영토는 사회계약에 동의한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과 일치한다. 그 밖에 사는 사람들은 권리를 존중받아야 하지만, 국가 법에 의해 강요되지는 않는다. 15년에 있었던 유럽 이민 사태에서 결과는 유럽 법에 의해 결정되는게 아니라 EU 소속국들의 상대적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 궁극적 힘은, 여전히 국가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레벨에서의 힘의 통제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인권의 가치는 보편적이지만, 힘은 보편적이지 않다. 국가는 자국의 사회계약에 참여한 자국 시민에게 더 많은 권리를 줘도 된다. 타국인의 권리까지 지켜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투표권은 국민만이 가진다.
초국가적 집단을 만들어 권력을 양도하는 것은 가장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EU의 경우에조차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류는 국가체계 하에서 권력을 사용하고 통제하는데에 제일 익숙하다.
칸트는 자유로운 국가들 사이에는 영구적 평화가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불행히도 세계가 이런 후역사적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군사력이 여전히 개별 자유국가들의 궁극적 안전을 보장한다. 국제 정치에서 국가가 행위자로서 몰락할 날은 아직 멀었다.
-좋은 삶
개인의 자율성이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임에도, 그것이 좋은 삶에 대한 다른 모든 비전을 자동적으로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사람은 선택의 자유를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문화적 규범으로 제한하는 데에 불만이 없다. 수정헌법 1조는 사람이 종교를 못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종교를 가질 권리를 가지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성공적인 자유 사회는 자신들의 문화와 좋은 삶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것이 단일 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들은 자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가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들이 공공성, 관용, 열린 마음, 참여의 정신을 가져야 사회가 유지된다. 그들은 혁신, 기업가 정신, 위험 감수의 마음을 지녀야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자신들의 내적 소비를 늘리는 데에만 골몰하는 개인의 집합은 사회 자체가 아니다.
국가는 합법 권력과 폭력 조절의 도구이기 때문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이다. 보편 자유주의는 인간의 사회성에 위배된다. 사람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서 가장 큰 애착을 지니기 때문이다. 더 자신에게 멀어질 수록 의무는 서서히 사라진다. 인간 사회가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이러한 애착의 범위는 가족에서 마을로, 부족으로, 국가 전체로 번졌다. 그러나 소수만이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충성심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범위이다. 실로, 이러한 충성심이 국가의 합법성과 통치 능력의 기반이 된다. 미얀마와 나이지리아와 같은 어떤 사회에선, 약한 국가 정체성이 재앙과 같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시리아에서도 그렇다.
-자유 국가주의에 대해
이스라엘 학자 하조니는 국가주의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국가의 주권에 기반한 국제 질서에 대해 말한다. 그는 미국이 타국을 너무 자기 원하는대로 바꾸려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그런데 그는 기존에 있던 나라들이 각자의 본래 모습대로 살 때 세계가 가장 평화롭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틀렸다. 오늘날의 국가들은 정복, 폭력, 강제 동화, 문화 상징 조작 등의 역사적 난관을 뚫고 건설되었다. 국가 정체성엔 더 낫고 더 못한 것이 있으며, 사회들은 그 중 원하는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다.
만약, 국가 정체성이 인종, 민족, 종교에 기반해 있다면 이는 동등한 존엄성이라는 자유주의의 원칙을 어기는 것이다. 보편 자유주의와 국가 정체성 사이에 꼭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긴장의 가능성이 있다. 고정된 특성에 국가 정체성이 기반할 경우 20세기 전반부의 유럽과 같은 공격적인 민족주의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 사회들은 이러한 고정된 특성으로 집단을 명시적으로 나누려 해서는 안된다. 물론, 민족집단이나 종교집단이 같은 땅을 수 세대간 점유한 발칸반도,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선 자유주의가 실패하고 이런 구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곳에선 사람들을 더 큰 국가 정체성으로 묶는 것이 힘들 수 있다. 한편 여러 문화적 개체를 묶어 자유주의 정치를 할 수도 있다. 인도를 예를 들면 이들은 다양한 언어를 인정하고 과거엔 주들이 각자의 교육과 법 체계를 입안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다양성이 높은 나라들은 연방주의와 국가보다 작은 개체들을 인정해야한다. 네덜란드는 이런 식으로 매우 잘 돌아간다. 하지만 보스니아, 이라크, 레바논에서는 국가보다 작은 행위자들이 제로섬 게임을 벌이며 투쟁한다. 만약 문화집단이 굳어지지 않은 곳이라면 이들을 나누기보단 국민으로 대우하는 것이 훨씬 낫다.
다른 한편으론,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더 널리 퍼져야할 국가 정체성도 있다. 문학 전통, 역사적 관점, 언어, 음식, 스포츠와 같은 것이다. 카탈루냐, 퀘벡, 스코틀랜드는 모두 뚜렷히 다른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진 곳이며 이곳의 사람들 중 일부는 본국과의 단절을 꾀한다. 이들이 분리되더라도 자유로운 곳으로 남을 것임은 틀림없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리처럼 말이다.
국가 정체성은 명백한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건설된 것이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위해 갉아내지기보단 보강될 수 있다. 호주, 캐나다, 프랑스, 인도, 미국은 모두 민족, 종교보다는 정치 질서나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이다. 호주와 캐나다는 많은 이민자를 받았음에도 인종간 갈등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국가 정체성을 날카롭게 나눠진 민주국가에서 만드는 것은 어렵다. 프랑스, 독일, 일본, 대한민국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국가였다. 미국처럼 체제가 먼저 들어서고 국가를 형성한 경우가 특이한 것이다.
자유주의를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양성을 관리하는 수단으로만 보고 더 넓은 국가적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위험할 것이다. 폭력, 전쟁, 독재를 겪은 사람들은 자유 사회에 살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일단 자유로워지면 그들은 더 좋은 것을 원한다. 1914년에 유럽은 거의 1세기 넘게 대전쟁이 없이 자유로웠지만, 사람들은 전쟁에 뛰어들며 즐거워했다.
세계는 인간 역사에서 비슷한 지점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지난 30년간 대전쟁 없이 평화로웠고 엄청난 부와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EU는 성공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리 앞에 폭력의 전조를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두가지 매우 다른 미래를 우리는 볼 수 있다. 만약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공격하는데에 성공한다면, 세계는 20세기 초반처럼 공격적이고 비관용적인 곳으로 변할 것이다. 미국 역시 이 추세에서 예외일 수 없다. 트럼프와 같은 자들이 푸틴의 독재적 방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약 푸틴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법에 기반하지 않은 권력은 국가적 재앙으로 끝난다는 자유주의적 교훈을 다시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에 대한 꿈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소련 망했을때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했다가 틀린걸 인정해야 했던
자유민주주의 극렬 빠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최근 글.
후쿠야마 자신, 터커 칼슨이나 패트릭 드닌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자유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 같은데 어쩐지 좀 궁색한 변명같은 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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