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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 의 첫 문장이자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환경을 소개해주는 문장이며, 개인적으로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기억할 내용으로 꼽았다. 

밤의 밑바닥을 머릿속에서 형상화하니, 마치 밤이라는 덩어리의 바닥이 흰색 파스텔로 비벼 얼룩진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눈의 곱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듯해서 더욱 풍경이 푸근하게 느껴졌고, 겨울의 불쾌한 축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여기서 새로 발견해 낸 기쁨은 눈으로 서양인의 춤을 볼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보지 못한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한 탁상공론이 없고 거의 천국의 시에 가깝다.  연구라 해도 무용가의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춤추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상상으로 서양의 언어나 사진에서 떠오르는 그 자신의 공상이 춤추는 환영을 감상하는 것이다.”


내가 문학에서 묘사를 좋아하고, 특히 <설국> 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변해주는 문장이다. 나는 한 번도 일본에서의 눈 내린 모습을 본적도 없고, 비슷한 환경을 걸어 본적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책에서의 묘사는 더욱 아름답게 내게 다가왔다. 위의 문장에서 말하듯 문장에서 떠오르는 나 자신의 공상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이러한 사실을 대략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는 있었지만 뚜렷하게 표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연히 소설의 작은 일부에서 이러한 명확한 설명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달은 아직 흐릿하여 겨울 밤의 차고 깨끗한 느낌은 없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하늘이었다. 산자락에 펼쳐진 들판이 거침없이 좌우로 드넓게 뻗어 나가 강가에 거의 닿을 만한 지점에 새하얀 수력발전소 같은 건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량한 겨울 차창 밖에서 어슴푸레 저물어갔다.”


어슴푸레, 이 단어 하나 때문에 이 문장을 꼽았다. “어슴푸레” 라는 단어는 내가 읽었던 문학에서 항상 적절한 시기에,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에서 등장하는 것 같다고 예전부터 느꼈다. 어쩌면 어슴푸레 라는 단어가 사용될 만한 제한적인 상황이(새벽, 달빛, 밤, 어두운 방안) 모두 내가 좋아하는 ”공상이 춤추는 환영” 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배경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위 내용들은 모두 내가 <설국> 안에서 마음에 들었던 문장 3가지를 뽑은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문장들을 뽑을 때, 설명에 적었던 내용을 인지하고 뽑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문장을 보고 나중 에서야 이유를 떠올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글로 무언가 마음에 든다고 설명할 때는 가슴에 담겨있는 혼란한 느낌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기에, 그 느낌과 상응하는 표현을 나중 에서야 적어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위 3가지 내용에서 책의 나머지 내용과 특별하게 다른 부분은 없다. 단순한 묘사만 3가지를 뽑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내용들의 의미는 그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특정 감정을 하나하나 글로 풀어낸다면, 어쩌면 백과사전에 단어의 뜻과 예문을 상세히 적어 넣는 것처럼, 그 백과사전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나중에 감정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느끼지만, 풍경을 정말 아름답게 표현한 책이다. 이 책을 읽은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토록 신선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는 책이다. 책의 대부분이 이러한 섬세한 묘사로 가득인데, 몇시간동안 빽빽한 설명으로 가득한 글을 읽는다면 지치거나 지루할 만도 하지만, 글을 읽으며 매순간 감탄하게 되는 그러한 책이었다. 반면에 조금 특이했던 점은, 소설이 흐름에 따라 명확한 스토리가 있기 보다는, 마치 산책을 하며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풀어놓은 것처럼 특별히 손으로 집을 만한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밀한 풍경묘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좋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