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자 감소의 방법
한자 완전 폐지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여, 우선 한자를 감소시키는 것은 어떤 방법을 들어서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 방법에 있어서는 2가지가 있다.
제 1의 방법은 정부의 힘을 통해 한자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가령 문부성이나 그 외의 관청에서, 조야의 학식 있는 사람들을 모아 위원회를 조직하여, 각종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그리고 일반에서 사용하는 법령, 또는 공사 관용의 서식 등을 조사하여, 현재 상황에서 써야만 한다고 인정되는 한자를 제시하여, 동시에 그 한자에 대응하는 가나를 정하여 매년 이를 공포하여, 공사 일반에 준수하도록 한다면, 점차 한자를 감소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몇 십년 후에는 사회에 격변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마침내 한자를 완전 폐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 방법이 좋다고 하여 이를 실행하려 한다면, 물론 여기에 대해 필요한 법률을 반포하여 방해하지 않도록 하며, 또한 확실히 한자감소에 착수하려 한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 학제를 개혁하여, 도저히 고등 교육을 받는 데에 이르지 못하여 그 학업을 그만두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이것을 위해서는 따로 하급 학교를 설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소량의 한자 외에는 모두 가나로 기재하여, 가나를 통해 교수하며, 가나만을 통해 편리함을 얻는 것만을 꾀하여, 점차 다른 학교에도 이것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한자 감소를 진전시키는 하나의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제 2의 방법은 여론의 힘을 이용하여 한자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일상사용 서간에서도, 신문지 / 잡지의 종류에서도, 적어도 줄여야만 한다고 인정된 한자를 가능한 한 감소시켜서 가나의 사용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대체적으로 한자 감소의 노력을 증가시켜 한자 완전 폐지의 영역에 달하는 시기도 어느 정도 빨라질 터이다.
이 제 2의 방법은 물론 어떠한 제재도 없는 일이니까, 여론에 호소하여 이것을 찬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하류층 사회의 꼬락서니를 보자면, 다행히도 한자사용의 폐단을 깨달아, 근래에는 국어개량 등의 설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으니까 일반 여론에 호소하여 한자감소의 경향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신문지상, 잡지류나 또한 전단지 광고 등의 1회용 인쇄물에 있어서, 즉 폭넓게 대중에게 알리려고 하는 글에서는 가능한 한 한자를 줄이고 있으며, 또한 한자를 줄일 수 없는 곳에서 그 한자에는 후리가나를 붙여 해독에 편리를 도모한다.
때문에 만약 여론에 호소하여 한자 감소가 바람직하다고 그 필요를 인정받아, 신문지, 잡지류에서 가능한 한 한자를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면, 여론의 힘에 의해서도 물론 크게 한자 사용을 줄일 수 있을 터이다.
이상의 2가지 방법은 만에 하나 그 한 가지라도 실행된다고 한다면, 한자의 감소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다행히도 두 가지 모두 실행된다고 한다면, 더욱이 한자감소는 빠르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인의 상황에 대해서는, 근래 한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한자 사용은 앞에서도 말했던 것과 같이 줄어들고 있다. 정부가 발표하는 공문서에서도, 법전 등에 사용되는 문자와 같이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제외한다면 수 년 전에 비하면 한자 사용은 줄어들고 있다. 그 한자 감소를 위해서 문장은 속어에 가까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비난도 있으나, 이것은 결코 비난해야 할 일이 아니다. 속어에 가까우면 가까워질수록 그 편의를 더해나가게 되는 것이며, 속어에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곤란함을 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제 현재의 상황에 있어서 한자 감소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니까, 한 발 더 나아가 정부의 법령에서 한자 사용의 감소를 제시하여, 여론의 힘을 들어 한자사용을 감소시켜 나간다면, 마침내 한자 완전 폐지에 이르는 시기를 더욱 빠르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위의 방법 중 하나라도 실시한다면 그 효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나, 가능한 한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여, 이로써 하루라도 빨리 한자 완전 폐지의 영역이 달하게 되는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6. 일본학 학자의 오해
한자 사용을 감소시킨다면 이것을 대신해 사용해야 할 문자는 가나이다. 이 가나의 사용이 증가한다면 마침내 한자를 완전 폐지하는 데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세간의 한자 전폐론자 중에는 우리들의 주장과 그 취지에 달리하는 자도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는 일본학 학자(和学者)로서, 이러한 사람들은 한자를 완전 폐지하여 이것에 대응하는 문자로 가나를 사용하려 한다는 점은 우리들과 같은 의견이지만, 그 사용하려 하는 가나는 지금 세속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야마토코토바’라고 칭해지는 일종의 고어를 사용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주장과는 크게 다른 점으로, 우리들은 고어를 들어 한자를 대용하려는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야마토코토바라는 것은 고상하며 아름다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정취 있는 사람의 오락에는 가장 적절한 말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아마도 정확한 일본어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어를 쓴다는 것은 도저히 일상의 편리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굳이 이 고어를 들어 한자를 대용하려고 한다면, 한자를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욱 곤란한 점이 많을 것이며, 어떠한 편리함도 얻을 점이 없을 것이다.
한자는 과연 난해한 문자임에 틀림없지만, 그 글자수도 많고 그 의미도 넓은 것으로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야마토코토바라는 고어는 전혀 여기에 반대되며, 그 글자수도 의미도 매우 협소한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오늘날의 날로 새로워지는 사물을 표현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야마토코토바라는 고어는, 한자에 비해서도 훨씬 뒤떨어진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한자를 감소시키면서 이것을 대용할 문자는, 이 고어가 아니라, 보통의 일반에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속어라는 것을 들어 대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속어라고 한다면 ‘아어(고풍스런 옛말)’에 대응되는 말로, 실제로 야비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속어 중에는 저속하게 사용됨이 틀림없는 단어들도 많다. 그렇다고는 해도 속어를 모두 야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시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다. 어느 나라의 말도 본래는 매우 속된 것으로서, 그 속어라고 칭해지는 것은 곧 세속 일반에 사용되는 것으로 확실히 편리하게 쓰이고 있다는 증거가 되며, 이러한 속어를 사용하여 어떠한 고상한 도리도, 어떠한 어려운 문제도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현재 연설 속기에 있어서도, 야담 속기에 있어서도, 또한 근래 많이 쓰이고 있는 언문일치체의 소설에 있어서도, 어떠한 일이라도 어떠한 어려운 문제에 있어서도 속어를 사용하여 이것을 말하고 표현하며, 그 속어 그대로를 기재하여 어떤 사람에게라도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마침내 크게 그 이해를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야마토코토바라는 것을 사용하여 이것을 기재한다면, 편리함을 얻을 수가 없다. 언문일치체 등은 도저히 바랄 수가 없을 것이며, 한 종류의 곤란함을 제거하면서 더욱이 수 배의 곤란함을 배양하는 일이 된다. 무엇이 아쉬워서 이렇게 난해한 고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명료하다.
고어의 쓸모없음은 위에서 논한 바와 같다면, 이 고어에 기초하여 깊게 가나 표기법을 연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가나 표기법의 난잡함은 문장의 난잡함을 만들어내며 흡사 한자 사용의 난잡함과 같기 때문에, 문장의 난잡함을 배양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그렇기에 우선 가나 표기법을 논의한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나쁜 일은 아니나, 그 논의의 주지는 보통의 일반에 사용되기에는 어떤 식으로 되어야 편리할까를 논의하는 점에 있으며, 단지 고어에 기초한 가나 표기법을 논의하여, 고어를 표준으로 하여 속어를 규제하는 등의 행위는 무익한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한자를 완전 폐지한다고 하면, 오늘날의 언어와 문장은 그 근원을 한자로부터 가져오는 것이며, 야마토코토바로부터도 가져오는 것이 된다. 때문에 한자를 감소시키면 가나 사용을 증가시켜야만 하지만, 가나의 사용을 증가시킨 결과 한자를 완전 폐지하는 데 도달한 시점에서, 한자어와 야마토코토바에 대해서는 이에 대해 논의해야만 할 것이며, 또한 다소는 이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학자의 본분으로서 이것들을 강습시켜야만 한다는 점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야마토코토바라는 것을 들어 한자에 대용하려 한다면, 우리들의 의논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결코 여론의 찬성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7. 한자 감소의 실제 사례
우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가능한 한 문장을 평이하게 하여, 독자의 이해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기사는 말할 것까지도 없고, 논설과 같은 것에서도 회화체로 기재하는 일이 많다. 이것은 우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점이다.
우리들은 결코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꼬락서니를 보면 문장은 한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소수이다. 한문에 멀면 멀어질수록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다수이다. 이것은 다툴 필요도 없는 사실이며, 신문지라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또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다면 어떤 논의를 주장한다 해도 그 논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어떠한 사항을 기재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세간에 전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기 때문에 문장을 평이하게 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으며, 이와 같이 쓰여진 문장으로서 이미 평이한 문장을 쓰도록 노력하고 있는 이상, 문장을 구성하는 문자도 가능한 한 평이한 것으로 하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며,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주장인 한자 감소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가나를 사용하는 것보다 때로는 편리함이 없지만은 않다. 또한 신문지라는 것은 행의 수에도 제한이 있으며 식자(植字)의 상황이라는 것도 있기에, 부득이하게 한자를 사용해야만 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한자는 독자의 이해에 어려움을 안겨주는 일이 많다. 한자를 사용하면 그 한자에 후리가나를 달아줘야만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다. 한자를 기재하고 여기에 가나를 달아주면, 식자를 위해서도 교정을 위해서도 여러 종류의 과정을 더하는 것 외에도, 독자에게도 다소의 번잡함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를 감소시키면 독자에게 어떠한 불편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소의 편의를 가져다주어 신문 사업에 있어서도 일손을 아끼고, 적지 않은 편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자 완전 폐지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면, 위와 같은 편의성은 한층 명확한 것이 될 것이다. 그 때가 된다면 구미(歐美)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이, 기계를 사용하여 문자를 찍어내는 일도 용이하게 될 것이다. 신문사업 상에서도 수많은 편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헤아리기도 어려운 점일 것이다. 비단 신문에서만이 아니다. 사회 일반의 많은 문자를 사용하는 부분에서도 같은 편의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다. 한자 완전 폐지의 영역에 도달한다면 이 편리함이라는 것은, 한자 감소의 경우에 비해서도 물론 그 몇 배의 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많은 말로 번거롭게 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또한 한자에는 유사한 문자가 엄청나게 많다. 때문에 이것을 판별하여 사용하는 것은, 문장 속에서 다소의 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다소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사한 형태가 많은 한자를 모두 분별하여 사용하여, 다소의 묘미를 느낀다 하여 실제로는 어떤 이익도 없는 것이다.
가령 ‘요쿠’라는 단어에는 ‘善’의 글자도 있다면 ‘能’의 글자도 있다. 또한 ‘好’도 있으며 ‘克’이라는 글자도 있다. 혹은 또한 ‘타다’라는 단어로 보자면 只、唯、惟、怛와 같은 글자가 있다. 이 외에 이런 류의 글자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한자를 기초로 하여 논한다면, 상세하게 이러한 문자를 분별하여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실로 무익한 일인 것이다. 평이한 일본 문장으로서는 이러한 한자를 일절 쓰지 않으며, 단지 ‘요쿠’ 또는 ‘타다’라고 가나를 써서 기재한다고 해서 어떤 불편한 점도 없다.
위와 같은 주장으로부터 우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그 문장을 평이하게 함과 동시에, 그 난해한 문자인지 아닌지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도 감소시켜야만 할 한자는 가능한 한 감소시켜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신문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법률도 아니며 교과서도 아니다. 따라서 홀로 스스로 믿는 바를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혹은 잘못된 점도 많아서 지식인의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한자 감소는 그 편리함이 있으며 아직 그 불편함을 보지 못한다는 실제 사례는 이것에 의해서도 그 한 측면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8. 결론
이상 회차를 거듭하여 논한 바는 우리들의 숙론이지만, 다행히도 큰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정부 관계자를 통해 법령의 힘을 사용하여, 한자 감소를 꾀하는 것에 힘을 기울여줬으면 한다. 또한 세간의 지식인들도 한자 사용의 감소를 꾀하는 것에 힘을 다해 줄 것을 원한다. 한자 사용의 폐해와 한자 감소의 편리를 논하면, 거의 끝이 없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이 한자 감소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곤란한 사업만은 아니다.
이로써 문명의 진보에 지대한 편리함을 부여하는 일이라고 믿음으로써, 감히 숙론을 주장하여 조야의 찬성을 바랄 뿐인 것이다.
보론
앞서 한자감소론을 공공에 분명히 한 이래, 각지로부터 찬성의 서간을 받아, 여론의 경향도 대개 추측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부성에서도 국어조사의 비용을 청구했다는 모양이지만, 각지의 찬성자도 정부의 방침도 반드시 우리들의 의논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욱이 몇 마디를 덧붙여서 전에 이야기했던 주장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려고 생각한다.
메이지 33년(1900) 3월 2일 하라 다카시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문장은, 입말과는 크게 다르며, 즉 언문일치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여론이 인정하는 바인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이런저런 말을 보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보는 관점으로서 말하자면, 지금의 문장은 언문일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 문장을 보면 읽는 것과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논에서는 한자를 감소시켜, 그 감소시킨 결과 마침내 한자를 완전 폐지하는 데 도달시킬 수 있다면 언문일치 문체로 바꾸고 싶다고 희망하는 바이지만, 그 결과를 얻는 데 이르는 사이, 즉 한자를 감소시키는 중이 있어서도, 가능한 한 언문일치체에 가까운 것을 희망한다. 그렇기에 앞서의 한자감소론에서도, 세간의 이른바 속어를 사용하여, 난해한 말을 피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한자 완전 폐지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면, 완전히 가나를 사용하여 기재하는 것일 테니까, 이 가나를 기재하는 것에 있어서도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논도 스스로 생겨날 터일 것이다.
우리들도 또한 이 일에 대해서는 뒤에 한 마디 해두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보고 읽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보통의 문장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언문일치의 문장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폐단이 있다. 가령 언문일치체에 기재된 문장에서 ‘諾矣諾矣‘라고 쓰고 ‘아이아이’라고 읽으며, ‘猶且’라고 쓰고 ‘야하리’라고 읽는다. 어째서 이러한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아이아이’라거나 ‘야하리’라는 것은, 보통 사용하는 말이니까, 이것을 읽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라면 그저 그에 해당하는 가나만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것을 보면 ‘諾矣諾矣‘ 또는 ‘猶且’라고 기재하고 있다. ‘諾矣’라는 문자가 ‘아이’라고 맞출 수 있고, ‘猶且’가 ‘야하리’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 걸린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무익한 일이다. 또한 ‘甚麼’라고 쓰고 ‘돈나’라고 가나를 달고, ‘這麼’라고 쓰고 ‘콘나’라고 가나를 달고, ‘那麼’라고 쓰고 ‘안나’라고 가나를 다는 것도 종종 본다. 이것들의 글자는 지나(중국)에서 사용된 속어로, 보통 한문을 해독하는 자라 하더라도 이해하기에 어려운 속어이지만, 그 속어를 굳이 사용해서 이것을 일본의 속어로서 가나를 단다. 그 속어와 속어라는 것은 마침 들어맞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것이 또한 크게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예를 찾아본다면 실로 헤아릴 길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폐단은 문학자라는 작자드르이 문장에 특히 많으나, 일상 생활에 쓰이고 있는 것들 중에서도, 이러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流石’라고 쓰고 ‘사스가’라고 읽고, ‘五月蝿’라고 쓰고 ‘우루사이’라고 읽는다. 어째서 ‘사스가’라고 가나를 써서 쓰지 않으며, 또한 ‘우루사이’라고 가나를 써서 기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것들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곳의 단어이면서, 누구라도 읽을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무익한 단어를 열거하여, 다소 그 문장의 맛을 살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 때문에 언문일치체라고 해도 이것을 보고 쓰는 것의 사이에는 큰 차이를 낳는다. 눈으로 보면 ‘諾矣’이며, ‘猶且’이지만, 이것을 읽을 때는 ‘아이아이’라거나 ‘야하리’라거나 하며 읽으며, 甚麼, 這麼 등의 부류도 모두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이것을 보면 읽는 것과의 사이에 차이가 있다. 언문일치체가 아니라도 이러한 것은 피하고 싶다. 더욱이 언문일치체로 하려면 이러한 것은 반드시 피해주었으면 한다.
소설이든 속기든, 그 외 모든 언문일치체로 기재된 것을 보자면, 크게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무익한 단어를 채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가장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므로, 이것도 한자 감소와 함께 그 폐단을 줄였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또한 한자를 감소하는 데 있어서, 난해한 글자를 피하는 것 외에, 난해한 글자라도 하더라도 가나를 들어 기재하여 마땅한 것은 가나를 들어 기재하자는 것은 우리들이 희망하는 바이나,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将平諫曰,王有命可妄冀, 願熟図之’ 라는 한문이 있다. 이것을 보통의 문체로 번역할 때에는, ‘장평이 간하여 말하길, 제왕에게 명이 있으니, 함부로 이를 바라지 말라. 바라건대 이를 숙지하라.’ 와 같이 쓰고, 소학교나 그 외의 곳에서 배우는 책에도 이런 식으로 기재된다. 먼저 보통의 문장으로서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체제이지만 이것을 언문일체로 기재한다면, 장평 간하여 말하길 제왕이라는 것은 천명이 있으므로 망령되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이를 깊이 생각함이 옳다. 라고 기재한다면 앞서 언급한 언문일치체가 된다. 언문일치체이기는 하나, ‘왈(曰)’이라는 글자, ‘유(有)’라는 글자, ‘망(妄)’이라는 글자, ‘가(可)’라는 글자, ‘지(之)’라는 글자, ‘의(宜)’라는 글자는, 가나를 써서 기재해도 아무 차이도 없다. 즉 이 문장에서 6개의 한자를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한자를 제거해나가는 것은, 단지 난해한 글자를 피하는 것만이 아니다. 가나를 사용하여 읽어야 할 한자는 이 한자를 폐지하는 것이 취지에 적합하다. 우리의 희망하는 바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하여 한자를 감소시킨다면, 마침내 전혀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끝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전의 한자감소론에서도 한두가지의 실제 사례를 들어두었기에, 독자는 대개 이해했을 터이다. 그러나 또한 그 취지를 명확히 해두고 싶다고 생각하기에 이 일을 말해 둔다. 세간의 한자 완전 폐지론자 혹은 한자 감소론자 중에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어서 일일이 여기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한두가지의 주장을 들어본다면, 새로이 일본의 문자를 만들자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물론 우리들과는 크게 반대되는 주장으로, 일본 고래의 언어와 문장이 없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오늘날까지 성립되어 또한 발달되어 왔으며 세간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이것을 쓰고 있는 문자(가나 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행할 만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 주장에 대해서는 깊게 논의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때문에 공론(空論)으로서 배척하는 바이다.
다음으로 가나를 들어 기재한다면 끊어 읽을 부분이 분명하지 않다, 앞의 어미와 뒤의 문장의 앞머리가 섞여 별도의 글자인 것처럼 이해되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현재 가나를 들어 기재하는 전신문에서도, 종종 그러한 오해를 불러오는 점이기는 하다. 그러한 폐단이 있다고 지칭되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론은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그 폐단을 교정하는 것도 우리들이 가장 먼저 동의하는 점이나, 그 폐를 고칠 수단으로서, 일본의 문장을 구미(歐美) 각국에 있어서 사용되는 문자와 같이, 한 단어 한 단어 사시에 띄어쓰기를 함으로써 한 글자 단위로 분리하여 기재하자는 설이 있다. 구미의 문장을 표준으로서 생각한다면 확실히 그와 같이 하고 싶다고 희망하는 바이지만, 이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큰 불편함을 느껴 곤란함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의 문장을 기재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은 습관은 전혀 없다. 따라서 새로 강습을 하게 된다면, 이와 같은 쓰기 방법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에게도 점점 이를 가르쳐 그 학생이 성장하여 그 사람들만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데 이르게 된다면, 충분히 이렇게 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겠으나, 현재 문자를 사용하여 문장을 기재하는 우리들이 새로 이와 같은 쓰기 방법(띄어쓰기)를 배워야만 한다면, 도저히 지금의 상황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억지로 이 방법으로 기재하도록 한다면, 전혀 편리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며, 또한 그 쓰기 방법의 다름에 의해 의외의 혼란을 낳을 우려가 있다. 따라서 대체적인 의논으로서 한 종류의 주장이기는 하나, 지금 우리가 이것을 실행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로서는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 문자를 만들자는 것도, 서양 언어와 같이 한 글자 단위로 띄어서 쓰자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면, 문자도 쓰기 방법도 전혀 종래와 같이 하면 좋겠느냐는 말을 우리가 동의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이와 같은 어려운 수단을 쓰자는 것이 아니다. 당장은 한자가 섞인 문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한자를 감소시켜 가나를 많이 사용하더라도, 종래의 글자를 사용하며, 종래와 같이 기재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한자를 완전히 폐지하여, 가나만으로 기재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 쓰기 방법을 우리들이 고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실로 의문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나만을 사용하여 계속해서 기재한다면, 자구의 혼잡함을 낳은 우려도 있으며, 해독에 불편한 점도 다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한 경우에는 점을 찍어 자구를 분명히 하는 방법이 있다. 이 점을 찍어 자구를 명확히 하는 것은, 우리들의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현재 한문에 있어서도 구독(구를 읽는 것)의 방법이 있다. 또한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문이 섞인 문장도, 그 방법이 다소 사용되어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있다. 때문에 대개 이 방법에 의해서 가나만으로 문장을 써도 혼잡함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만약 그렇게 하더라도 다른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면, 인명에는 글자의 우측에 줄을 긋는다거나, 지명이라면 왼쪽에 긋는다거나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리하여 이러한 류의 방법은 번역서 등에는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니까, 이 종류의 방법을 진보시킨다면 혼잡을 피할 수 있으며 곤란함은 없을 터이다.
전의 논의에서 논한 것처럼 한자감소와 동시에, 가나의 사용법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일이 되어가는 정세에 있어서도 가나의 사용법은 해를 거듭함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 진화의 궁극에 어떤 쓰기 방법이 나올지, 혹은 서양 언어와 같이 기재될지, 혹은 또 크게 바뀌어 가나보다 로마자로 바꿀지가, 이것은 오늘 이 시점에서는 예지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헛되이 새로운 안을 새우는 것은 실지로 효과가 없고, 도리어 개량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약하자면, 우리들의 논지는 사회에 격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편리를 도모하여 국가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길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므로, 문장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한문에 먼 언문일치체에 가까운 것을 원하며, 글자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한자를 감소시켜 마침내 한자 완전 폐지의 영역에 달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은 더욱 복잡해지며, 생존경쟁도 또한 열기를 높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니까, 한가한 이의 오락으로서는 이런저런 묘안도 있지만, 오늘날의 실제에 적용하기 어려운 의논은 아무리 교묘한 논의라 할지라도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리는 국민 일반의 편리를 희망하기 때문에야말로, 이러한 논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결코 국민 일반의 불편을 낳으면서 우리 이상을 성공시키자고 꾸미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자 감소라는 것이 몇 명에게나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또한 실제로 행해질 수 있는 일인지, 세상 사람들의 공평한 판단을 기대하는 바이다.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