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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죄와 벌의 번역 문제
· <죄와 벌>의 번역 문제 - 라스콜리니코프의 침




필자는 재야의 낭만주의자 "제임스초이스"이다.



지난번 글에서 우리는 매우 사소한 듯한 디테일이 어떻게 주인공의 성격을 결정하는가를 살펴보았고,



그러한 미세한 디테일이 여러 역자의 번역들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었는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의 분석이 사회 각계 각층의 독갤러들 사이에서 다소 반향을 일으켜, 개념글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저번에 <죄와 벌>의 매우 사소한 디테일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 다룰 주제는, 작품의 언어가 절정에 다다라, 절규 속에서 절망과 천국이 교차하게 되는 극적 장면의 표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다룰 장면 속에서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으면서 세계를 지탱하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 갑자기 인간 쓰레기 알콜 중독자의 입을 빌어 더러운 지하 술집 안에 현현한다.



(여담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애독자였고, 한때 러시아로 이주할 생각에 러시아어를 배워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아래 구절은 1부 2장에서 이루어진 마르멜라도프의 고백의 대단원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천국의 비전이 교차하는 극단적인 절규를 보여준다.



번역들을 제시한 뒤 계속 이야기하겠다:



채수동역(홍신문화사 1992년판을 70년대판 번역을 참고하여 몇 군데 보충함):


"불쌍히 여겨? 뭣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겨야 되나?" 하고 마르멜라도프는 주인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며 극도로 흥분해서 불쑥 외쳤다. "뭣 때문에 불쌍히 여겨야 하느냐 이 말이지? 그래! 조금도 불쌍하게 생각할 건 없지! 나 같은 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할 인간이야. 형틀에 못박아 죽여야 마땅하다! 가엾게 여겨서는 안 돼! 그러나 재판관이여, 형틀에 못박는 것은 좋으나 못박은 다음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그렇다면 나 스스로 못박히러 찾아가리라!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깊은 슬픔의 눈물이니까. 여보시오 주인, 당신은 내가 이 술병으로 해서 즐거웠는 줄 아는가? 나는 술병의 밑바닥에서 슬픔을, 슬픔과 눈물을 구한 거야!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눈물을 맛보고 찾아낸 거야! 그러나 온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만물을 이해하시는 하느님만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심판관이다. 최후의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 <폐병 앓는 심술궂은 계모와 배다른 동생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판 딸은 어디에 있느냐? 지상의 술주정뱅이에다 건달인 자기 아버지의 그 짐승 같은 행실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엾이 여겨준 딸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소냐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라! 내 일찌기 그대를 한 번 용서했노라...... 한 번 용서했노라...... 지금 너의 많은 죄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네가 많은 사랑을 베풀었기에......> 하느님은 이렇게 소냐를 용서해 주실 거다. 나는 용서해 주실 것을 알고 있다. 아까 딸애를 찾아갔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꼈지!......(중략)......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꿇어 엎드려......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깨닫게 된다...... 그때야말로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이다! 누구나 다 깨닫게 된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도...... 역시 깨닫게 된다!......"



열린책들:


"동정한다고! 왜 나를 동정해야 하느냐고!" 갑자기 마르멜라도프는 손을 앞으로 뻗고 일어나,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감격해서 절규하기 시작했다. "왜 동정을 해야 하느냐고 말했나? 그래, 나를 동정할 까닭은 전혀 없어!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나 같은 놈은 십자가에 못 박아도 시원치 않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해! 재판관들이여, 못을 박으란 말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난 다음에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게! 그런다면 내가 자진해서 너희들에게 못을 박히러 오지. 왜냐하면 나는 즐거움에 목마르지 않고, 슬픔과 눈물에 목마르니까......! 이봐, 주인장, 네놈은 이 보드까 반 병이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나? 내가 이 병 속에서 찾은 것은 슬픔, 슬픔이었어. 슬픔과 눈물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찾아서 맛보았단 말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분은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이들과 모든 것을 이해하시는 그분뿐이지. 그분만이 유일무이하신 심판관이시다. 최후의 심판 날이 오면 물으시겠지. <악한 폐병쟁이 계모와 남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자기 몸을 판 딸은 어디 있느냐? 지상의 아비, 쓸모없는 주정뱅이를, 그의 짐승 같은 행동을 미워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긴 딸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말씀하실 거야. <이리로 오너라! 난 이미 지난번에도 너를 한 번 용서했노라...... 너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했노라...... 그러니 이제 너의 많은 죄는 용서받으리라. 왜냐하면 너는 너무 많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니라......> 내 딸 소냐를 용서해 주실 거야. 용서해 주실 거야, 난 그걸 이미 알고 있어...... 아까 그 애의 집에 갔을 때부터 난 벌써 그걸 마음속으로 느꼈어......! ......(중략)....... 그리고 우리에게 두 팔을 내미시면, 우리는 땅에 엎어져서...... 울면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거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겠지......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도...... 아내도 이해하게 될 거야......"



을유문화사:


"불쌍히 여겨! 뭣 땜에 나를 불쌍히 여겨!" 마르멜라도프는 마치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극도로 흥분해서,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일어서면서 갑자기 부르짖었다. "뭣 때문에 불쌍히 여기느냐고? 그래! 날 불쌍히 여길 건 조금도 없지! 나 같은 놈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돼, 십자가에, 불쌍히 여길 건 없어! 십자가에 못 박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러나 재판관,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는 불쌍하게 여겨다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내 발로 찾아가리다. 왜냐하면, 내가 목말라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이니까......! 여보게, 주인 양반, 이 작은 술병이 나에게 달콤함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술병 바닥에서 슬픔, 슬픔을 찾았던 거야, 슬픔과 눈물을 찾았던 거야. 그리고 슬픔과 눈물을 맛보았고 찾아냈어.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고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이해해 주셨던 그분만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거다. 그분은 단 한 분이시며, 그분이 심판관이시다. 그분은 그날이 되면 오셔서 물으실 거야. <폐병에 걸린 심술궂은 계모를 위해서, 남의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팔았던 딸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말씀하실 거다. <오너라! 나는 이미 너를 한 번 용서하였도다...... 너를 한 번 용서하였도다...... 이번에는 너의 많은 죄도 용서받으리니, 네가 많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로다......> 그러시면서 우리 소냐를 용서하실 거야, 용서하실 거야, 나는 그분께서 용서해 주실 것을 이미 알고 있어. 저번에 그 애에게 갔을 때 나는 그것을 마음속으로 느꼈어......! ......(중략)......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두 손을 내미시니, 우리는 땅에 엎어져서...... 울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집사람도 깨닫게 될 것이다......"



문예출판사:


"불쌍히 여긴다고! 아니, 뭣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하고 마르멜라도프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손을 앞으로 뻗치며 일어나서는 극도로 흥분한 표정으로 갑자기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불쌍히 여길 필욘 없다, 이 말이지? 암, 그렇고 말고!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욘 하나도 없지! 나 같은 건 손발에 못을 박아 죽여도 시원찮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불쌍히 여길 건 아무것도 없단 말야! 십자가에 매다는 거야, 알겠나, 재판관, 십자가에 매달란 말이야. 그러나 일단 십자가에 매단 다음에는 날 불쌍히 여겨주게! 그렇게 한다면 나도 자진해서 벌을 받으러 갈 테니. 내가 갈망하는 건 향락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이니까!...... 이봐, 술장수, 네놈은 이 술병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해줬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 밑바닥에서 슬픔을, 슬픔을 찾은 거야, 슬픔과 눈물을 말이야. 그리고 그걸 맛보며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만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만백성과 만물을 이해하시는 하느님,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겠지. 하느님은 유일무이하시고, 또 하느님만이 심판관이 되시는 거야. 최후의 심판 날에 오셔서 이렇게 물으시겠지. <심통 사나운 폐병쟁이 계모를 위해, 배다른 어린 동생들을 위해 자기 몸을 판 딸은 어디 있느뇨? 인간 세상에서 방탕한 주정쟁이 아버지의 만행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긴 딸은 어디 있느뇨?>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씀하시겠지. <자, 이리 오너라! 나는 그전에도 한 번 너를 용서해준 적이 있다....... 전에도 한 번 너를 용서해주었으나...... 이번에는 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것은 네가 많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해서 내 딸 소냐는 용서를 받을 거야. 암, 용서받다마다. 나는 잘 알고 있지, 그 애가 용서받으리라는 걸 나는 아까 딸애한테 갔을 때 이 가슴으로 분명히 느꼈거든!......(중략)......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두 손을 벌리실 거야. 그러면 우리는 땅에 엎드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 그때야말로 모든 걸 깨닫게 되는 거야! 우리 모두가 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그 사람도 역시 깨닫게 되는 거야......"



민음사:


"불쌍히 여기다니! 대체 왜 나를 불쌍히 여기겠어!" 마르멜라도프는 이 말만 기다렸다는 듯 그야말로 영감에 휩싸여 한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울부짖었다. "대체 왜 불쌍히 여기겠냐고 네놈은 말하는 거냐? 그래! 나 같은 놈을 불쌍히 여길 이유는 전혀 없지! 나란 놈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해, 불쌍히 여길 게 아니라 못 박아야 한단 말씀! 그래, 못 박아라, 재판관아, 못 박으란 말이다, 일단 못 박은 다음에 불쌍히 여기라고! 그때는 내 발로 직접 못 박히러 갈 것이다, 이 몸은 즐거움이 아니라 비애와 눈물을 갈망하니까......! 이 장사꾼아, 내가 네놈의 이 보드카 반병을 갖고 쾌락을 만끽했다고 생각하나? 비애, 비애야말로 내가 이 술병의 밑바닥에서 찾고 있던 것이며, 또 그 비애와 눈물을 여기서 맛보고 찾아냈단 말이다.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셨고 또 모든 이들과 모든 것을 이해하셨던 그분만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 그분만이 유일한 분이자 심판관이니까. 그분께서 그날에 오셔서 물어보실 테지. '못된 폐병장이 계모를 위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위해 자기 몸을 팔았던 그 딸은 어디 있느냐? 지상의 자기 아버지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주정뱅이를, 그의 짐승 같은 행각에 경악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히 여긴 그 딸은 어디 있느냐?' 그러고는 말씀하시겠지. '자, 이리 오너라! 나는 이미 너를 한 번 용서했다...... 한 번은 용서했노라...... 지금도 너의 많고 많은 죄가 용서되리라, 많고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니......' 그러고는 나의 소냐를 용서해 주실 거야, 용서해 주시고말고.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나는 벌써 알고 있어...... 아까 그 애의 집에 갔을 때 마음속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중략)...... 그러고는 우리를 향해 두 손을 내미실 것이고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고......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다들 깨달을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그녀도 깨닫게 될 것이다......"




1. <상징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



미르스끼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징주의적인 측면을 매우 훌륭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적 지층을 다룬다. 이 심리적 지층에서 정신과 의지는 보다 높은 영적 실체와 항상 접촉하고, 경험의 일반적인 흐름은 항상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들에 부딪혀 깨지며, 영혼의 바람은 결코 잦아들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자의식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상처받고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한 인간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고통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분석하지 않고 재건한다. 톨스토이의 의문은 항상 '왜?'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문은 '무엇'이다. 이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많은 소설 속에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분석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그들의 내적인 삶을 드러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는 그들이 행하고 말하는 것 속에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행동)과 절대적인 것(인격) 사이에 필연적인 진실한 상호관계가 있다고 믿는 상징주의자의 태도이다. 반면에 '청교도적' 지성의 소유자인 톨스토이에게 행동이란 치수가 없는 영혼의 본질을 덮고 있는 베일에 불과한 것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멜라도프의 극도의 절망과 자기 혐오의 순간에 천국과 구원의 비전이 현현하는 까닭이 이해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개의 극단, 즉 절망의 극단과 환희의 극단을 교차시키는데, 이 둘은 복합적으로,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극단적인 것들의 결합'은 발자크적인, 대표성과 유사성 들의 축적을 통한 '전형적인 인물상의 구축'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반대되는, 극단적인, 역설적인, 특수한 것들의 결합'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현대 소설을 넘어서 현대 예술, 현대 정신에 미친 매우 깊은 영향력의 열쇠들 중 하나이다.



(당연히 이런 면에서 <롤리타>의 나보코프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런 면에서는, 현대 작가들 중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자유로운 작가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가장 크고 해묵은 오해들 중 하나는, 그를 대표적인 <심리소설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 심리의 묘사 면에서 핵심적이고 대단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미르스끼가 분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심리를 직접 분석하기보다는 '묘사하고, 재건한다'.



한 마디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본질적으로 심리학자라기보다는, 이야기꾼에 가까운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 도스토예프스키 이후의 현대 소설을 얼마나 오도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이루어져 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심리학>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매우 훌륭한 글이 있다:



타자에 대한 윤리



이런 면에서,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체로 심리를 '묘사'할 뿐, '분석'하지 않는가가 다소 이해된다. - '인간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2. <낭만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



"뜨이냐노프는 러시아 문학에 관한 한 18세기가 프랑스적인 영향력을 의미했던 것처럼 19세기는 독일적인 영향을 의미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 R.H.스타시



'독일적 영향력'은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낭만주의의 영향력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여기서는, E.H 카가 언급한 바, '철학이 꽃피기에 매우 비옥한 토양'이었던 러시아적 정신의 어떤 경향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카에 따르면, 서구적 관점이 행위를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반해, 러시아적 관점은 내적 감정과 정신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카는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육체적 방종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관용을 견지하면서, 정신적 과오에 대해서는 가장 엄격한 기준으로 심판하는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인들이 도덕적 판단에 있어 행위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도둑질하다 들키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죽여요. 그럼 당신은 모든 것에서 무죄 방면될 테니’ 같은 <악령> 속의 풍자시는 이러한 러시아적 경향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에서 인용하겠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 그것에서 나타날 어떤 실제적인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러시아의 현 정권에 대한 외국인 비판자들은 대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서구적 개념에서의 선인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감정에 대한 행위의 굴복은 분명히 죄의 개념에 깊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죄스러운 행위는 죄스러운 정신 상태보다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가 허무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면서 도둑, 거짓말쟁이, 주정뱅이에게는 무한한 관용을 베푸는 것이 이와 같은 정신에서이다.>



<서구의 도덕적 면모는 법정과 형법에 어울리는 관념으로 고쳐져 왔으며, 우리는 감정과 의견에는 관대하지만 행위에는 관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늦게 회개하는 탕자의 방탕이 큰아들의 질투보다 왜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며 참회하는 한 사람의 죄인이 죄짓지 않은 99명의 존경받는 시민들보다 더 격려받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묵상하는 마리아가 식사를 차리는 마르따보다 더 사랑받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에 치중하고 행위에 냉담한 러시아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며, 미쉬낀은 바로 이 정신의 체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규율에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그리하여 마르멜라도프의 행위에 대한 평가, 즉, '익살꾼', '인간 쓰레기', '알콜 중독자'와 같은 정의들은 마르멜라도프의 본질의 심부를 건드리지 못한다.



마르멜라도프는 현실에서 어리석은 주정뱅이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는 천국과 구원의 비전을 직관할 능력을 가진 선량한 인간임이 드러난다.



그는 천국의 비전을 낭만주의적으로 "직관"하며, 이러한 마음속의 진실, 계시의 표현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레르몬토프를 잇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최고 계승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러한 면에서 극도로 '반낭만주의적', '합리적'이었던 톨스토이와 '낭만주의적' 도스토예프스키 사이의 대립은 우리의 통념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3. 절규의 번역



전체적으로 채수동역은 가장 세부적인 디테일들의 전달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일례로 첫 번째 줄에 일어나면서вставая가 생략되어 있다),



채수동역의 억양 조직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필자는 <현대적> 편집을 거치면서 디테일이 몇 군데 누락되고 열화된 홍신문화사 구판(1992) 텍스트를 70년대 텍스트를 참고하여 위에 복원해 놓았는데,



어조와 억양 들의 견고한 구성이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 않는 빈틈 없는 긴장을 이루고 있다.



어투의 고전적이며 세련미 넘치는 다층적인 풍부함은 다른 번역들을 상대적으로 비문학화한다.



- 즉, 다른 번역들을 비문학 지문처럼 상대적으로 무미건조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다.



채수동역에서는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절규의 격렬한 억양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다.



억양 조직 면에서는 김학수역도 뛰어나지만, 단순히 다른 번역문들의 분량이 11줄을 넘지 않는 데 비해 거의 12줄에 이르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부연이 많고 템포가 다소 늘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1 눈여겨볼 만한 대목으로는,



- 나는 이미 너를 언젠가 한 번 용서했다..... 언젠가 한 번 용서했던 것이다.....Я уже простил тебя раз... Простил тебя раз....



이 대목에서는 구문의 단순 반복이 이루어지는데,



열린책들판은 <너를 한 번 용서했노라...... 너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했노라......>고 다소 자의적인 부연을 하고 있다. раз에 <한번에, 곧바로>의 뜻도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단번에 영원히 용서했다'라는 해석은 '그러니 이제 너의 많은 죄는 용서받으리라.'라는 다음 문장과 어색하게 연결되는 듯하다.



그리고 민음사판의 <나는 이미 너를 한 번 용서했다...... 한 번은 용서했노라...... 지금도 너의 많고 많은 죄가 용서되리라,>와



문예출판사판의 <나는 그전에도 한 번 너를 용서해준 적이 있다....... 전에도 한 번 너를 용서해주었으나...... 이번에는 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을 것이다.> 등은



문장의 연결이 다소 어색한데,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이미 너를 한 번 용서하였다..... 한 번 용서하였던 것이다..... "이번에도" 너의 많은 죄는 용서를 받을진저Прощаются же и теперь грехи твои мнози>



이 정도가 어떨지?



즉 전에 한 번 용서했으니 이번에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인데, теперь(지금, 이제) 앞에 간과하기 쉬운 미세한 и(-도, 또한)가 있으니까?......



3-2 아까 딸애를 찾아갔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꼈지!......



이 구절에서 한 인간의 마음속의 불가해한 계시적 감각이 외부 현실 전체와 맞먹는다는 점이 표현된다.



즉 내면적 감정과 외부 현실의 동등성이 표현되는 것이다.



내면적 감정의 절대성은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테마이다.



우리가 이 테마를 약간만 더 앞으로 밀고 나갈 경우에는, 오히려 외부 현실은 우연적인 것이며, 내면의 계시적 감정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열린책들판의 <아까 그 애의 집에 갔을 때부터 난 벌써 그걸 마음속으로 느꼈어......!>의 '때부터'는 다소 왜곡된 부연이다.



'느꼈다!почувствовал!'는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이제는 그 느낌이 지속되고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마르멜라도프의 '느낌'은 순간적으로 불꽃처럼 마음속에 타올랐다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며, 그때부터 계속 느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3-3 천국의 현현



"현현"이라는 단어는 제임스 조이스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채수동역은 절망으로부터 거의 오페라적인 환희의 공간의 현현, 즉 신기루인 동시에 미칠 것 같은 확신의 공간인 천국의 현현을 이끌어낸다.



위 역본들 중 채수동역에서만이 이 <공간감>이 복합적으로 활력 있게 표현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꿇어 엎드려......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깨닫게 된다...... 그때야말로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이다! 누구나 다 깨닫게 된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도...... 역시 깨닫게 된다!......">



이 번역의 역동에 비할 만한 것은 없다.



신기할 정도로 잘 된 번역인데, 다른 판본들에서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매우 기계적으로 번역되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특히 <누구나 다 깨닫게 된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도...... 역시 깨닫게 된다!......и все поймут...и Катерина Ивановна... и она поймет...>에서 어조의 역동성은 원문을 능가하는 것 같다.



이 어조의 생생함을 비교해보라:



<그리고 우리에게 두 팔을 내미시면, 우리는 땅에 엎어져서...... 울면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거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겠지......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도...... 아내도 이해하게 될 거야......>(열린책들)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두 손을 내미시니, 우리는 땅에 엎어져서...... 울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집사람도 깨닫게 될 것이다......>(을유문화사)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두 손을 벌리실 거야. 그러면 우리는 땅에 엎드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 그때야말로 모든 걸 깨닫게 되는 거야! 우리 모두가 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그 사람도 역시 깨닫게 되는 거야.....>(문예출판사)



<그러고는 우리를 향해 두 손을 내미실 것이고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고......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다들 깨달을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그녀도 깨닫게 될 것이다......>(민음사)



4. <죄와 벌>의 낭만주의에 대한 나보코프적 해석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지적하며 '책의 구조 전체를 도덕적으로, 미학적으로 허물어뜨려 버린 결함'이 결정적으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촛불이 깜빡이며 가난에 찌든 방에서 같이 영원의 책을 읽고 있는 살인자와 매춘부를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을유문화사,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



Огарок уже давно погасал в кривом подсвечнике, тускло освещая в этой нищенской комнате убийцу и блудницу, странно сошедшихся за чтением вечной книги.

타고 남은 촛불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부러진 촛대 속에서 희미해져, 이 빈궁한 방 안에서, 이상하게도 영원한 책을 읽으려고 모여 앉은 살인자와 매춘부를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보코프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철학자, 시인, 사회학자,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살인자와 불쌍한 매춘부를 하나의 호흡, 하나의 거짓 수사 속에, 그것도 성스러운 책 위에 서로 너무도 다른 머리를 조아린 모습으로 나란히 놓아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들이 믿고 있는 신은 이미 19세기 전에 매춘부를 용서하셨다. 하지만 살인자는 무엇보다 의학적 진단이 필요한 인간이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비인간적이고 멍청한 범죄는 몸을 팔면서 인간 존엄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소녀의 가련한 처지와 전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영원의 책을 함께 읽고 있는 살인자와 매춘부라니! 말도 안 되는 난센스다. 추잡한 살인자와 불운의 소녀 사이에는 어떤 수사적 고리도 없다. 고딕풍이나 감상주의적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 통념상의 연결 고리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조잡한 문학적 속임수지 비애와 경건함이 엿보이는 대작이 아니다. 예술적 균형미 부재는 또 어떤가.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를 추악하리만큼 상세하게 보았고, 그의 범죄에 대한 대여섯 개의 서로 다른 설명을 들었다. 소냐가 몸을 파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미화된 클리셰다. 매춘부는 너무도 당연하게 죄가 있는 것으로 치부된다.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보코프의 비판은 그가 <죄와 벌>의 진정한 동역학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4.1 <영원한 책>과 <매춘부와 살인자>는 단순한 감상주의적 모아 놓기가 아닌, 매우 드라마틱한 대조를 보여준다.



즉 <영원한 책>이라는 상투적인 수사 앞에서 <매춘부와 살인자>는 본질이 아닌 껍데기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성서 앞에서 <매춘부와 살인자>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지칭하지 못하게 된다.



성서와 <매춘부와 살인자>는 드라마틱한 대조를 이룬다.



어째서인가? - 우리는 앞서 마르멜라도프의 절규 속에서 구원의 비전이 계시되는 것을 보았고, 그의 환각 속에서, 사랑을 베푼 소냐의 구원을 보았다.



그러므로 <소냐가 몸을 파는 장면이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매춘부 소냐는 '당연히 죄가 있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나보코프의 비판은 매우 엉뚱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앞서 나온 350여 페이지 동안에 소냐는 전혀 죄인으로 치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의 말을 재인용하자면:



<......죄스러운 행위는 죄스러운 정신 상태보다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가 허무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면서 도둑, 거짓말쟁이, 주정뱅이에게는 무한한 관용을 베푸는 것이 이와 같은 정신에서이다.>



전술한 바, 도덕적 판단에 있어 '행위보다 마음'을 중요시하는 러시아적 낭만주의의 척도로 재 보았을 때,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도덕적 판단을 위하여 핵심적인 것은 당연히 소냐의 '매춘 행위'가 아니라 영혼으로써 '사랑을 베풂'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매춘부>라는 지칭은 '사회의 희생양'인 소냐에 대한 부당한 매도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의 <파편화된 인간관>과 <직업화된 인간관>에 대한 아이러닉한 반박으로 읽힌다.



(고골의 <외투> 이래로, 관료주의 속에서 직업에 정체성을 잡아먹힌 인간들을 다루는 '하급 관리' 테마는 러시아 문학에서 유구한 전통을 형성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전통의 대표자들 중 하나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2 <매춘부와 살인자>는 결코 주인공들의 본질을 규정하지 못한다. - 여기서도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냐가 매춘 행위에 의하여 단순한 매춘부로 규정되지 않듯이,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살인 행위에 의하여 단순한 살인자로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살인자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뉘우칠 수 있으며, 구원과 갱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좀처럼 규정되지 않는다. - 인간은 모순이며 수수께끼이다.



그리하여 러시아적 감수성 특유의, '죄인에 대한 연민'이 심오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4.3 물론 '믿는' 매춘부와 '허무주의적' 살인자 사이에도 본질적이고 강렬한 대립이 존재하며, <죄와 벌>을 견인하는 동역학의 요체는 대립들의 중첩 아래서 쉽사리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의 문장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는 '이상하게도странно' 모여 앉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립들은 '인간 속의 인간'에 대한 믿음 위에 존립하는 긴장이며(사실 '인간 속의 인간'이란 그 자체로 얼마나 낭만적인 관점인가),



주인공들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할 경우에는, 소냐는 매춘부가 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당연히 <죄와 벌>의 기저에 놓인 이러한 낭만주의는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매춘부와 살인자>에 대한 나보코프의 비판은 매우 엉뚱하고 피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인간 정신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근대 독일의 낭만주의 이전에, 언제나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로자노프 식으로 말해서, '여기에서도 인간은 이념 이전에 있는 것이다.'



즉 낭만주의 이전에도 낭만주의적 인간은 언제나 있어 왔다. - 예를 들어 돈 키호테가?



흔히 말하기를, 현대는 낭만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한다.



오늘날에 인간은 영혼은커녕 행동으로 평가되는 것조차 아니며, 직업, 학.벌, 재산, 독서갤러리 완장 등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이 글이 받는 추천 개수를 통해서 독서 갤러리에는 낭만주의자들이 몇이나 남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추천은 낭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