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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울증'이라고 말하는 것에 걸린 사람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절망감이나 인생의 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절대로 죽음이 갑자기 매혹적으로 보여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투명한 고통이 버틸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는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불이 난 빌딩에 갇힌 사람이 창문 밖으로 뛰어넘는 논리와 똑같다. 창문 밖으로 뛰는 그 사람에 대해 오해하지 마라. 그가 느끼는 공포는 우리가 그 똑같은 창문 너머의 경치를 보려고 머리를 들어내밀 때 느끼는 공포과 똑같다. 즉 추락해서 죽는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상황의 제2의 변수는 또 다른 공포의 존재이다. 불의 공포가 가까워지면 추락의 공포는 조금 더 나아보이는 공포가 된다. 추락의 갈망이 아니다 - 불의 공포다. 하지만 보도에서 위를 보며 '뛰지 마요!'라거나 '버티세요!'라고 말하는 타인들은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리가 없다. 추락의 공포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타는 그 방에서 직접 불꽃을 느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만은 타인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똑같다.

난 택시 안에서 "도서관이요. 밟아 주세요." 하는 것처럼 매사를 대하지.

다른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얼마나 드물게 의식하는지를 깨닫는다면 조금 덜 신경쓰게 될거야.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감정은 진정으로 사람다워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람답다는건 아마도 불가피하게 감상적이고 순진하고 끈적거릴 것이고 또한 일반적으론 한심하기 때문이다.

불공평이 너를 가르치게 놔두는 방법을 배워라.

그것은 광고가 해야 할 모든 역할을 수행했다 : 해소 가능한 불안을 소비를 통해 만들어 내는 것.

분명 다양한 종류의 자살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자기혐오를 하는 부류는 아니다. 예컨대 "나는 엿같고 세상엔 내가 없어야 해." 같은 말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자기 장례식에서 무슨 말을 할지 상상해버리는 타입. 나는 요양원에서 그런 타입들을 만났다. 끔찍한-내가-싫어-날-벌해줘-장례식에-와줘. 그 뒤에 그들은 당신에게 자기가 키우던 죽은 고양이의 20x25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그건 모두 엿같은 자기연민이다. 정말 개소리다. 난 딱히 원한이 없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적도 없었다. 이런 타입들은 모두 스스로를 해친다. 난 아무도 해치고 싶지 않았으며 특히 나 자신은 더욱 그랬다. 난 그저 밖으로 나가길 원했다. 더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았던게 전부다. 난 그저 의식적으로 행동하는걸 멈추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전혀 다른 타입이다. 더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스스로를 긴 혼수상태에 빠트릴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는 스스로에게 쇼크를 줄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다, 대신에 말이다. 

논리적 타당성은 진리의 보장이 아니야.

냉소와 농담은 종종 그 내부에서 병동의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힘겨운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물질에 중독된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 그 자체에도 중독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생각과 강박적이고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은 때때로 사람들이 정말로 어떤 주제나 목적을 향해 깊이 빠져들 수 있고, 몇년동안이나 끝까지 이런 관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검은 기적처럼 여겨진다. 평생을 바친다는 것. 그것은 존경스럽지만 동시에 한심했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우리의 삶을 무언가에 바치기를 죽도록 갈망하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