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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문학을
1. 반드시 필요한 문학, 2. 있어도 무해한 문학, 3. 있어서는 안되는 문학으로 분류한다.
새롭고 탁월하며 독특한 문학이 1일 것이고,
1의 영향 아래 있으나 다양성 혹은 세부 장점을 이어받아 특히 발전시킨 작품들은 2라 생각한다.
3은 한 마디로 지리멸렬한 작품이다. 스스로는 새로운 변주라 생각하지만
이미 신선함을 잃은 멜로디를 기교마저 없는 솜씨로 늘어놓는.
피아노 학원에서 3년 째 바이엘을 뛰어넘지 못하는 초등학생의 연주를 굳이 레코딩할 필요가 없듯,
이런 작품이 출판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김영하의 신작은 SF이며 3의 유형이다.
엄정한 과학적 상상력이 척추와 같은 이 문학 사조를 수입한 김치작가들은
이 장르를 교조적 판타지 혹은 유아틱한 동화를 써도 되는 면죄부로 유용하는 경향이 있다.
'엄정한'과 '과학적'이란 개념에 붙은 방점은 못본 척 '상상력'에만 집중한 채
페미니즘, 생태주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상 등의 PC한 무지갯빛 환상만을 서투르게 채색해,
방싯 웃는 햇님과 꽈배기 모양의 구름이 떠다니는 유치한 동화를 써놓곤 뿌듯해 한다는 뜻이다.
저 이상에 이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고민과 사상이 필요한 지는
K-SF 작가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미취학 아동들이 정형화된 낙원을 그리는 것이, 그 이상을 이루겠다는 의지나 방법론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지금 행복해 죽겠다는 표현이거나 유치원 선생의 명령에 따르는 피동적이거나,
혹은 선생이나 부모의 수요에 맞는 그림을 납품해 머리 쓰다듬이나 용돈 몇 백원 받으려는 계산적 행위이듯.
내 크고 아름답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상을 봐달라는 인정욕이거나,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은 경지의 '있어보이고 힙하지만 쉬운 글'이란 독자 수요에 맞추려는
자기과시적이고 피동적이며 시장친화적인 개짓거리가 그들의 관심사인 것만 같다.
K-SF를 지배하는 주요한 분위기 중 하나가 저런 저지능적 행태이다.
인류가 이대로 살다간 멸종할 거라는 비관적 전망은 1895년 조지 웰스가 <타임머신>에서 했다.
'로봇'이란 단어가 문학에 쓰인 최초의 사례이자 창조자 인간이 피조물 로봇의 질문과 저항과 쓸모에
당황하는 이야기인 <로설의 유니버설 로볷>이 발표된 것은 1920년이다.
AI가 스스로의 지적 능력을 발전시켜 기계성, 물성을 초월하고
우주의 에너지와 공간을 오직 지적 사고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최후의 질문>으로 1951년에 간략하고도 탁월하게 보여줬다.
'호접지몽'을 SF식의 언어로 표현하며 휴머노이드의 정체성 혼란을 다룬,
제목만으로도 절창인 PKD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1968년 작품이다.
인간 의식이 AI와 네트워크의 힘을 활용해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은
1991년 테드 창이 <이해>라는 단편을 통해 기술정합적으로 워낙 탁월하게 다뤄냈기에,
2014년 비슷한 소재를 쌈마이틱하게 다룬 뤽 베송의 영화 <루시>는 욕을 존나 처먹었다.
그런데 (비꼬는 게 아니라) 김치문학의 희망, 김영하는 위의 주제의식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주제를,
길게는 100년도 전에 쓰인 작품보다 기법, 발상, 스토리 자체, 과학 및 기술적 엄밀성 등
어떤 기준으로 견주어도 단 하나도 나은 점이 없는 작품을 2022년에 발표했다.
"인간이 만든 로봇이 본인이 인간인 줄 알다가 로봇임을 뒤늦게 깨닫고 염병하다 인간이 사라진 미래까지 생존하다 쥬금"이 이 중견 작가가 쓴 SF의 줄거리니까.
진짜 이게 다다. 하.. 시발.. 내 2시간..........
김영하가 원래 김초엽 정도의 작가였다면 내가 저 따위 작품을 끝까지 읽고
이따위 장문을 쓰는 일도 없었을 거다.
내가 아는 김영하는 존재하는 편이 훨씬 나은 작가다.
신인답게 도발적이고 치기어린 작품으로 데뷔한 그는 자기복제를 반복하는 모사과 작가마냥
거기 안주하지 않고 거의 매 단편집이나 장편집에선 새로운 영역의 작품을 써왔다.
<검은 꽃>은 솔직히 지루했지만, 일반적 평은 별로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나, <살인자의 기억법>
혹은 단편 <그림자를 판 사나이> 속 여전한 도발성과, 이 칼날을 솜씨있게 감싸는 우아한 칼집 같은
형식미, 그리고 그 칼날을 빛에 따라 다른 광채로 보이게 하는 상징과 다의성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내가 그의 장편을 읽기 시작하며 기대했던 것은 저 모든 장점과 SF라는 장르의 결합이 아니었다.
그가 본래 가진 장점의 1, 2가지라도 이 새로운 장르와 결합되어 시너지를 냈길 바랐다.
등단 27년차 작가에게 저 정도를 기대한 것이 과욕이었는가??
바이엘 밖에 못치는 초딩의 연주를 비난할 순 없다.
게다가 아파트 윗집에서 그러는 게 아니라면 마음 속으로나마 응원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근데 사실 저걸 녹음한 음원이 멜론 차트 1위를 찍고,
'한국 피아노계의 희망' 등의 멘트와 함께 팔린데도 사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근데 시발, 본래는 작곡-창작-이란 걸 할 줄 알았던 양반이, 바이엘 음원이 차트에서 좀 팔린다고
그 지랄을 떨면 솔직히 욕을 처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무리는 시발.. 밀리 니네도 엿이나 먹어라, 시발련들아.
니들 밀리 오리지널 기획이라고 계약금 및 인세 제대로 지급 안했지??
그래서 빡친 작가가 이따위 글 쓴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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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로 풀리는 거라서 대충 쓴 게 분명함. 난 <오직 두 사람>도 진짜 좋게 읽었는데 이런 똥을 줄 줄은 몰랐음...
솔직히 구라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영하가 얼마나 글을 잘쓰는 사람인데 ㅋㅋㅋㅋㅋㅋㅋ 분명 밀리에서 제시한 단편 인세가 인건비도 안나오는 수준이라 개빡친 상태에서 억지로 늘린 게 분명함 ㅋㅋㅋ
ㄴ김영하가 글을 잘쓰는 사람은 아님. 한계가 뚜렷한 작가. 본인도 그걸 알기 때문에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 뉴욕타임즈 칼럼 쓴거 읽고 처음에 장난친줄 알았음. 절대로 글을 잘쓰는 사람은 아님
문단의 중진들이 SF를 잘 모르면서 호기심에 SF를 써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해 부족으로 영 덜떨어진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많음. 윤대녕의 [사슴벌레 여자]도 별로였고, 백민석의 [러셔]는 최악이어서 작가가 일시적으로 절필을 선언하기까지 했음. 심지어 한창 전성기 시절의 이문열이 SF에 도전했던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역시 좋은 평을 듣지 못했고... 또 비슷한 일이 김영하에 의해 반복된 것이라고 생각함.
나도 좋아하는 작가지만, 방송타고 책보단 북클럽으로 수익 창출하고 뭐 그런 걸 시작하면서부터 작가로서 발전하기는 힘들겠구나라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ㄹㅇ 띵작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