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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를 한 작품으로 예단하기란, 곧 한 사람의 일면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짓이라는 교훈을 이 책에서 얻었다. 내 옌렌커 입문작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는데, 군대에서 읽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인상 깊이 읽히었다. 옌롄커라는 작가가 중국 문단의 이단아라는 칭호는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 수위를 드러내는 소설이라면, 특히나 중국에 출판된 소설이기에. 검열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납득했다. 그런 만큼 최근에 개봉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라>가 그다지 좋은 평을 못 받고 있는 실정에, 원작에 대한 평까지 영향이 갈까 우려스럽다. 하정우가 감독한 <허삼관> 또한, 감상하지는 않았으나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예고편만 봐도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역시 배경을 북한과 비슷한 곳으로 설정해놓았지만, 중국이라는 배경 하에 놓임으로써 드러나는 원작의 민감함이, 영화를 구태여 보지 않아도 절반도 채 못된 모양새였다. 이러하니 옌롄커가 과연 무라카미 하루키와 버금가는 야설 작가로 폄하되어도 괜찮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확신한다. 단연코 그럴 수 없다.
모옌의 <개구리>와 비슷한 중국의 환성적인 연출과 더불어, 그러나 작풍의 또 다른 양상으로서 옌롄커식 중국 역사 탐방기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해당 책의 출판사는 시대 배경이 문화대혁명이라 명시해놓았지만, 사건만으로 판단하건대, 시기 상으로 그 이전인 대약진운동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문화대혁명 운동이 그전에 벌인 강철 생산 운동을 되풀이 하지는 않았을 테고, 거기다 기근이 함께 언급된 적이 없다. 보통 강철 생산과 기근이 쌍으로 묶이는 중국의 사건이라 한다면, 대약진 운동밖에 없다. 그러한 운동이 벌어지는 시대의, <사서>의 화자인 '작가'는 위신구라는 수용소의 참상을 냉정하게 풀어낸다. 특기할 점은, 제목의 한자어에서 드러나듯이, 본 작품에서는 네 개의 책에서 발췌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늘의 아이>, <죄인록>, <옛길>,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시시포스 신화>, 각 가상의 저서들이 한 작품으로 엮이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각자 상이한 문체들과, 이야기의 주요 인물들, 그 자체만으로 흥미롭지만, 가슴을 적시는 대목은, 위신구에 벌어지는 참혹한 실상들이다.
그 즐비하게 이어지는 위신구의 끔직한 나날들, 초중반은 평범한 군생활이 떠올랐지만, 극후반부는 가히 광기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당최 이러한 사건들이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 옌롄커가 말하는, 소설로서 보이는 거짓을 매개한 진실들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서가 현재 중국에서 금서 조치 받았다는 점에서 대강 가늠할 따름이다. 이러니 종교란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위신구의 신앙심 깊던 인물인 '종교'는 원망한다면 초월자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사를 대변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읽어보건대, 나로서는 옌롄커 이 작자는 어떠한 종교적인 영감이 큰 영향력을 발휘됐는지, 최후의 '아이'의 행동은 무언가 성스러운 감응을 불러 일으킨다. 이 아이의 행동은 과연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까. 원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대신해, 모든 이들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의 모습은 다시금 새로운 해석을 도출하기를 이끈다. 중국의 서구 종교는, 중국 현 시대 작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개구리> 후반부 전개, 희곡에서 마치 솔로몬의 재판이 연상되는 풍경과 나란히 둔다면, 무언가 통하는 공감대가 형성됨을 유추한다.
그리고, 대망의 <시시포스 신화>는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통하여 재발견된 시지프 신화은, 증극에서 어떻거 보여지는 것일까. 이 서구의 부조리 철학이, 중국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작중에서 오르막길에서 밑에서 저절로 위로 굴러가는 길이 나오는데, 막간에 그러한 길을 언급한다. 신이 아랫길에서 위로 끌어올리는 시지프가 사랑을 알아버린 행색을 보고, 또 다른 곳에서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리는 형벌을 새롭게 내린다. 아래로 끌어내리자, 돌은 위로 저절로 올라간다. 그러자 시지프는 사랑을 알아버린 원인에게 원망을 하였으나, 주위에 형성된 풍경들을 보며 자신의 행동을 반복하면서 즐긴다. 그러나 신에게 들통나지 않도록 표정을 숨긴다는 대목은, 옌롄커다운 각색이었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시지프 신화는, 계속되는 부조리 속에서도, 그 부조리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생기를 불어놓는 행동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옌롄커는? 우리 동양의 시지프는, 돌을 끌어올려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향한 사랑에서도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나는 그렇게 읽힌다.
이런 점에서 모옌이나, 위화, 옌롄커 작가들을 보다보면, 중국에 대한 그나마 부러움을 느끼는 분야이지 싶다. 현재 일문학의 영향력은 예전만큼 못한 형세이고, 국문학은 구태여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 번 글이 올라오는 현실이다. 동아시아 문학의 미래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중국몽이라 비난을 받고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보건대, 현재는 중국이라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중문학의 약진이 이뤄지는 원동력은, 역시 당의 횡포와 역사 묻기에 급급함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더 높게 평가 받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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