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이 글은 한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왜, 소학과 동몽선습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소학은 주자 대에 나온 것이며, 동몽선습은 심지어 조선중기의 작품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건데 연대순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맞지 않겠나? 물론 현대에도 철학 원전보다는 주해본으로 시작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없다만, 유교가 당대의 통치원리였음을 감안하면 현대의 독자들은 굳이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통치원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층들은 통치원리를 취했다. 나는 일전에 아이를 혼내던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다: “아빠는 집 안에서는 하나님이야. 하나님 말을 들어야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하던가? 제가의 논리가 치국의 논리로 발전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지배층은 결국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조선의 폐쇄성이 있다. 바로 머리카락을 제 목숨처럼 여긴 부분이다. 공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라 하였으나, 논어를 읽어보면 자식이 다치면/병들면 부모가 마음을 아파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객이 전도되고 또 악화되는 역사를 보면 쿠란을 문자그대로 맹신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이러한 보수성은 유교의 정점인 공자에서부터 나온다. 공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바로잡을 방법을 주나라 질서로의 복벽을 제시한다. 결국 군군신신부부자자란 주나라 봉건제의 복원이다. 


혹자는 n살이 되면 논어를 읽어보라 하는데, 위의 이유를 토대로 나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다. 물론 오래 살은 사람의 통찰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것은 낡고 썩은 부분을 발라내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젓가락질을 잘 하는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역시 통치원리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보증을 서지 말라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비판적 읽기는 현대에 와서는 시민의 기본소양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서양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양에서도 물론 과거의 제도와 사상을 수용했으나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더욱 발전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근원에 대한 물불 안가리는 의견이 오갔으나, 동양의 유교는 공맹의 공리를 토대로 그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맹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항산항심에 있다. 내가 아끼는 철학자중 한 명인 칼 포퍼는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모두 지옥을 만들었다’ 고 꼬집었는데, 유교의 대동사회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맹자가 바란대로 ‘50된 이에게 비단옷을 입하고 70된 이에게 고기반찬을 먹이는 것’ 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겠는가? 매일을 굶은 백성에게 통치자가 격물치지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를 이루기를 기다리도록 하는 것은 백성을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메슬로우가 말했듯, 우선 생리적인 욕구가 해소되고 나서야 우리는 사람 흉내를 낼 수 있다.


다시 유교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유감스럽게도 내가 유교에 할 수 있는 말을 이것 뿐이다. 다른 종교들과 크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나팔로 생활소음을 일으켜 무고한 이들의 성곽을 무너뜨리고, 검과 횃불로 행복한 가정을 불사르는 짓거리를 긍정적으로 기술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높이 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면, 천년왕국과 대동사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