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7월 11일 IRA와 영국군의 정전이 이루어졌으며, 1921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는 통일 아일랜드의 성립 가능성을 끝내버린 것이었다.
이 조약은 마이클 콜린스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한 독립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로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배반이자, 공화국을 위해 고통받고 죽어간 많은 이들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1922년 1월 7일, 찬성 64: 반대 57로 조약이 의회에서 비준되었으며, 1월 14일 마이클 콜린스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발족하였다. 1월 16일에는 더블린 성이 영국으로부터 새로운 임시정부에 인계되었으며, 1월 31일에는 베거스 부시 기지(더블린 시내에 있던 영국군 주둔지)가 반환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영국군 병영 및 기지의 인계 작업이 시작되었다.
2월 중순경 ‘국방군(National Army)’의 조직이 시작되었는데, 2월 말이 되면 리머릭(Limerick)에서 조약 반대파와 조약 찬성파간의 긴장감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조약 반대파와 찬성파가 서로 영국군이 철수한 군 기지를 차지하려 하며 긴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조약 반대파는 새로운 군 사령부를 수립하였는데, 여기서 리암 린치(Liam Lynch)가 참모총장이 되었고, 리암 멜로스(Liam Mellows)가 군수사령관이 되었으며, 로리 오 코너(Rory O’Connor)가 기술감이 되는 등 새로운 사령부의 진영이 갖추어졌다.
3월 26일에는 IRA 군 대표회의가 소집되어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조약 반대, 임시정부 국방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등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에 맞서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통제를 받는 새로운 군 조직의 창설작업에 박차를 가해, 3월 28일에는 국방군, 그리고 시민 민병대를 새롭게 모집하기 시작했다.
4월 9일에는 IRA의 2차 군 대표회의가 소집되어,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비준시켰으며, IRA의 대원을 지원제로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공화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명백히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행위였고, 이에 임시정부는 IRA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음으로서, 아일랜드군은 분열되었다.
4월 14일, 아일랜드 법원 포 코츠(Four Courts)에 대한 점거 명령이 조약 반대파 IRA 지휘부에 의해 내려지면서, 사실상 내전으로 가는 서막이 열렸다.
당시 점거부대의 지휘관 중 하나인 로리 오 코너의 진술에 따르면, ‘이는 쿠데타가 아니며, 혁명의 시작도 아니다’라는 것이었으나, 사태는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120명의 대원들이 법원을 장악하였으며, 창문들은 두꺼운 법전과 법률서적, 무거운 장부와 흙으로 가득 찬 상자로 바리케이드가 쳐지게 되었다. 이때 기록물 보관소(Records Office)가 무기 보관소로 결정되었는데, 이것이 이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리하여 4월 중순부터 6월 말까지 약 2개월 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약 반대파 IRA와 아일랜드 임시정부 국방군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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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는 내용을 읽으니까 확실히 이해가 좀 더 쉽긴 한데, 군사용어 같은 건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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