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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났다     저자 정동철|모악 |2016.09.30



시작부터 짧은 시와 긴 산문시가 연달아 나타나며 일종의 강렬함을 선사한다.

<노루>라는 시를 보니 <토끼 불알을 만진 노루>라는 동화와 더불어 이를 모티브로 만든 <모더니즘 탐정단>의 등장인물 노루가 떠올랐다. 나름 애정이 가는 등장인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모더니즘 탐정단> 시리즈의 후속작들이나 외전에 더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 노루를 좋아하는 독자님들께 죄송할 따름이다.

<오래된 우물>이란 시는 <전설의 고향>의 에피소드로 써먹어도 충분할 괴담처럼 보였다. 이 시를 바탕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면 괜찮을 것 같다. 미쓰다 신조 같은 작가의 괴담 이야기와 어울리는 시였다.

내 오해인지 모르겠으나 2페이지 이상 분량이 긴 시의 다음 페이지에서 연이 바뀔 때 띄어쓰기가 안 된 것 같다. 옥의 티였다.

<포릉포릉>이란 시의 제목은 일부 AKB48 팬들이 나이 어린 멤버들에게 귀엽다고 할 때 쓰는 표현인 뽀용뽀용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소아성애자들이나 쓸 법해서 개인적으로 불쾌한 단어이다. 성적 취향이 불건전한 나쁜 오타쿠 동지들을 주변에 둬서 괜히 시인님께 미안해진다.

<검정고무신>이란 애니메이션과 내용이나 분위기가 비슷한 느낌의 옛날을 배경으로 쓴 시가 자주 보인다. 시인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삶에 향수를 느끼시는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취향과 별개로 필사하고 싶지는 않으나 완성도가 높고 괜찮은 시가 적지 않았다.

<>이라는 시는 시인의 지난 과거를 연대기처럼 정리한 장문의 시였다. 삶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시인의 군 복무 시절 일화가 종종 언급된다. 시인에게 잊지 못할 만큼 영향력이 강한 시기였던 듯하다. 어떤 문인들은 작중 군대 얘기를 잘 안 하기도 하는데 이 시인은 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며 군대에서의 경험들을 떠올리는 듯하다.

시집의 중반부에 들어서며 점점 시들이 좋아진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성적인 묘사가 다분한 시들이 종종 보인다. 시인께서 여자가 그리우신 게 아닐까 싶다. 시인께 여자를 소개해드리고 싶으나 가상의 여자뿐인 나로선 내 코가 석 자다.

시인에게 이야기꾼 기질이 있다. 시가 아니라 소설이나 에세이를 써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일 타고난 재능을 갖췄다.

예상외로 시집에 쓰인 텍스트의 분량 자체가 많다. 그만큼 알찬 시집이다. 시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며 쓴 수필 같은 시도 종종 눈에 띈다. 이 시인도 운문보단 산문이 적성에 맞는 듯하다.

가족을 주제로 쓴 시도 자주 눈에 띈다. 주로 부모님이나 조부모와 관련된 시들이다. 시인께서 독신이 아닐까 추측된다. 아내나 연인, 자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가족이란 과거 함께 살았던 이들뿐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시인의 시 세계는 현재나 미래보단 과거에 멈춰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나도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부류인지라 시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과거에 얽매여 있어도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만족스러운 시집이었다. 특히 후반부에 수록된 시들이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