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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철학서. 핵심 키워드는 믿음이다.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걸맞는 책이다. 전에는 그리스도교와 서구문명에 대해 부정적인 시야가 강했으나, 요즘은 특히 개신교 쪽에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의견이 생겨났다. 서양 근대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상호 세가지가 영향이 연결되며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믿음에 대해 다루다보니 주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이고, 경향적이다. 학계철학과 상반된다고 보면 된다. 학계철학은 경향성을 자제 한다. 믿음과 상상을 다루지 않는다. 객관성을 중시한다. 객관성은 보수성을 지시하는 것이고, 깔아놓은 판에 현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월급쟁이가 직장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경향성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다. 물의를 일으킨다면 자신의 공들인 커리어와 연금이 흔들린다. 그들로는 사회의 온갖 고정관념을 공격하는 데는 한계가 자명하다. 고정관념은 고정관념이라는 이유로 몰락시켜야한다. 사회의 맹목적인 분위기가 만든 치석과 같은 노폐물일 뿐이다. 그래서 학계철학은 노폐물 위에서 이론을 새운다고 보면된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안뿌수는 이상 진보도 미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의 믿음이야 말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무기이다. 상식 수준으로 객관성을 보증 못받는 주관적인 사고의 산물을 믿음이라고 불 수 있다. 오히려 객관성은 분위기를 눈치보는데 그쳐서 깊이가 얕고, 시장판 같은 큰소리로 발언권 주도와 다굴엔 장사없는 이치에 따른 물리력을 앞세우기 때문에 힘의논리에 가깝다. 각각 국가로 치면 의회 언론과 군대를 장악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고정관념은 권력역학이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더 쎈 힘으로 압도해야하는데, 현실적으로 무기력하다. 분위기에 순응하는 것보단 주관적 믿음이 더 정교하고 깊이가 있지만 실험을 통하여 검증 하기전에는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험을 하려면 투자를 받아야하는 데, 투자 해주는 대상이 고정관념이 주무르고 있는 모순적 처지이다. 그런 기회 조차 얻기 힘들 것이다. 기껏해서 중간층에 올라가면 상류층은 포섭을 한다. 사회란게 긴밀하게 인적네트워크가 협조와 잉여생산물의 분배를 통한 적재적소 분업과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력만으론 뭔가를 성취하기 힘들다.
어떤 의미에서 무기력함에 의한 공포와 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 기적에 대한 믿음에 의한 공포와 전율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사실 미신적 뉘앙스가 강한 기적을 빼더라도 믿음 자체가 숭고함을 강하게 표상을 내포하고 있다. 비슷한 범주의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렇고, 당대 무신론이 팽배해질 때 작중인물로 무신론자를 등장시켜서 대결을 시켜본다.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믿기 위해 믿는다는 표현에 더 가깝다. 믿음 자체가 필요하니까 믿는다. 어느 문명권을 가나 거의다 사제계급이 최상류층을 차지한 것을 보아 효능을 증명한다. 중국 정도만 학자계급이 우대 받았지만 그것도 이데올로기에 가깝고, 오늘날도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 믿음 자체가 효력이 있다.
그러면 고정관념을 뚫는 새로운 믿음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대체로 사회모순이 극대화 되고, 고통이 증대될 때 유리한 환경이 된다. 그래도 고정관념의 꼴통종자들이
남아 심하게 반발하긴 하지만 잘짜여진 세계관의 이념을 확보해놔서 나쁠것은 없을 것이다.
책 주제가 이거였음?? 제목이랑 상당히 상반되네
두려움과 떨림